배드엔딩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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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 있었다. 신이 선물로 내려준 여자 아이를 플레이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양육해 훌륭한 성인으로 키워내는 게 게임의 최종 목표. 알바도 시키고, 교육도 시키고, 함께 바캉스도 가고, 가끔 국가 대회도 내보내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에 따른 보상도 준다. 대리 육아 체험판이라 보면 된다. 물론 현실 육아엔 티끌만큼도 못 미치겠지만.
일본 '가이낙스(GAINAX)'사가 1993년 출시한 이 게임은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최고 명작으로 꼽힌다. 여러 장점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다양한 선택지. 제목처럼 단순히 ‘공주 만들기’가 다가 아니다. 학교를 보내 공부를 시키면 지능이, 무술을 가르치면 체력과 전투실력이, 무용과 그림을 배우면 예술성이 실시간으로 오른다. 교회에 보내면 신앙심이 높아지고, 예법을 익히면 기품이 찬다. 여가 시간에 대화를 하면 플레이어와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자유시간을 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여기서의 킥은 이 모든 게 오로지 나의 ‘선택’을 통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그래, 이 맛이다.
하지만 어떤 선택에도 그 끝엔 책임이 따르는 법. 아이가 18살이 되면 게임의 엔딩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왔던 능력치를 통해 어떤 ‘성인’으로 성장했는가를 신으로부터 평가받는다. 평가 기준은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냉정하다. 나라를 통치하는 왕비나 지식인을 육성하는 학자, 대중을 즐겁게 하는 무용수 등은 높은 점수를, 반면에 암흑가의 보스나 도둑처럼 사회악이 되어버리면 마이너스 점수에 신으로부터 좋은 부모가 되지 못했다는 따끔한 질책까지 받는다.


<배드엔딩 메이커>
약 70여 개의 엔딩 중에 배드엔딩은 20개(*프린세스 메이커 2의 경우).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들은 어느 시점부터 공주를 키워내는 대신 이 소녀가 얼마나 나락으로 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시 평범한 엔딩보다 기구한 인생에 끌리는 게 대중의 본성이라면... 어쨌든 그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식적인 선택을 벗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시급이 높은 유흥업소에서 일주일 내내 일을 하게 만들고, 교육 일절 없이 노동과 전투에만 참여시키거나 사소한 대화까지 원전 차단하여 아이를 고립되게 했다. 혹은 돈에 눈이 멀어 엄한 마족과 정략결혼을 시켜버릴 수도 있었다. 분명 배드엔딩 직행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다 알면서도 저질러 버렸다.
대체 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배드엔딩에 끌리는 것일까. 현실의 나는 못하지만... 극적인 인생의 감정 롤러코스터를 향한 묘한 동경일까. 아니면 나는 저리 괴롭지 않으니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감 때문일까. 그런데 우린 원래 이랬다. 고대부터 비극이라면 환장하는 관객들은 차고 넘쳤다. 지금의 배드엔딩은 이런 고대 비극의 현대적 변주다. 여기서 ‘비극’에 대해 탐구했던 두 철학자의 분석을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 속에서 느끼는 공포와 연민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고, 니체는 인간은 비극적 예술을 통해 ‘삶의 고통까지 긍정’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그저 배드엔딩은 불완전한 인간 존재의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은 해피엔딩을 맞기엔 쉽지 않은 구조이니.

<노력이 통하지 않는 세계>
꿈도 희망도 없는, 나아가 노력조차도 통하지 않는 세계. 어떤 작품들은 각본가의 악취미로부터 태어난다. 가여운 것들. 그중 유난히 헛헛한 건 추적물의 배드엔딩이다. 추적의 과정이 섬세하면 섬세할수록, 때문에 관객이 깊이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더욱 그렇다.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의 ‘세븐(SE7EN, 1995)’이 아주 좋은 예다. 카톨릭의 7대 죄악을 하나씩 재현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범과 이를 쫓는 두 형사 '밀스(브래드 피트)'와 '서머셋(모건 프리먼)'의 이야기. 얼핏 보면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밀스와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서머셋의 패기와 노련함이 합쳐져 수사는 순항일 듯 보이지만,


애석하게도 이 두 형사는 범인인 '존 도(케빈 스페이시)'의 두문불출한 행동과 예상 밖의 살해수법에 영화 내내 쉴 새 없이 휘둘린다. 한 발 앞섰다고 생각하면 함정이 있고, 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빈틈으로 빠져나가 버리는, 그렇다. 이 스토리는 존 도의 설계에서 오차 없이 팽팽하게 유지된다. 영화 말미엔 범인 주제에 뜬금없이 제 발로 나타나 자수를 하는데, 이 행동 역시 죄책감과 뉘우침의 결과물이 아닌 수사물 사상 최악의 배드엔딩을 위한 전야제이자, 밀스를 황량한 사막 한 복판에 놓인 상자 앞으로 끌고 가기 위한 어둠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엔... 이 악명 높은 엔딩을 지키기 위해 브래드 피트는 계약서에 “엔딩 변경 불가”라는 항목까지 추가했을 정도라고.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완성된 후 여러 관계자들이 결말을 변경하길 원했지만 이 조약(?) 덕분에 엔딩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배드엔딩으로 질주하는 ‘세븐’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는 두 작품, 봉테일의 ‘살인의 추억(2003)‘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Memento, 2000)‘는 어떠한가. 끈질기게 매달렸음에도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 '두만(송강호)'과 '태윤(김상경)'.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몸에 증거들을 문신으로 새겨가며 고군분투한 '레너드(가이 피어스)'. 이들의 치열함은 밀스 형사의 증발된 염원처럼, 원하는 결말에 다다르지 못하고 결국 실패로 끝난다.

<실패의 구조는 직선이다>
‘실패의 구조는 직선이다’. 이는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소설 ‘죽음과 나침반(1942)’에서 차용한 표현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우선 소설의 내용을 살펴보자.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인 주인공 탐정 뢴토르. 그는 이제껏 해결 못한 사건이 없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명성에 취해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상태. 그러던 어느 날, 수수께끼 같은 힌트가 남겨진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골머리를 앓던 경찰은 그에게 협력요청을 한다. 뢴토르는 그러한 경찰을 비웃으며 기꺼이 수사에 참여하고, 집요한 추리 끝에 마지막 범행 장소를 유추하는 데 성공한다.

힘겹게 도착한 그곳에서 뢴토르는 사건 해결의 확신을 얻게 되지만, 이와 동시에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 그를 포박한다. 사실 이 모든 건 그동안 눈엣가시였던 탐정을 살해하기 위해 범인들이 꾸민 함정이었던 것. 뛰어난 추리 실력으로 어려운 사건을 해결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실력 때문에 제 발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간 뢴토르. 다음 범행 장소의 희생자는 뢴토르 자신이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직선으로 된 그리스의 어느 미로에 대해 알고 있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 직선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잘것없는 탐정도 충분히 길을 잃을 수 있을 거야.”
- 보르헤스, ‘죽음과 나침반’ 중
이처럼 서로 미로같이 얽혀있는 사건들은 그저 장식에 지나지 않을 뿐, 애초부터 작품의 길은 실패로 향하는 단 하나의 직선뿐이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드러낸다. ’세븐‘과 ’살인의 추억‘, ’메멘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마치 반복되는 수사 속에서 주체적으로 사건을 파헤치는 듯 보이지만 멀리서 본 그들의 모습은 이미 견고하게 설계된 실패 속을 헤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중간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이 참담한 실패의 세계에서 이런 가정은 존재할 수 없다. 밀스는 결국 상자를 열었을 것이고, 두만과 태윤은 잡히지 않는 범인을 평생 원망했을 것이며, 레너드는… 무슨 수를 써도 변하지 않는 과거 속에 사로잡힌 채였을 것이기에.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실패로 인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긴긴 세월을 괴로워했을 그대들이여. 그 마음 내가 죽도록 이해한다. 죄책감이야 말로 인간이 떨쳐내기 가장 어려운 감정이니까. 분노는 폭발하면 사그라들고, 슬픔은 엉엉 울면 시원해지고, 불안은 그 대상이 불분명하기에 되려 위안이 되지만, 죄책감은 다르다. 이미 죄는 저질러졌고, 다신 그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 게다가 그 죄가 고의도 아닌 어떤 실수였다면, 괴로움은 배가 될 것이니.

이런 끈적한 감정을 무시무시하게 잘 다뤄낸 작품이 있다. 바로 퀘벡 출신의 감독 '제레미 콩트(Jérémy Comte)'의 단편, '야수(Fauve, 2018)‘. 내가 접한 여러 엔딩 중 손에 꼽을 만큼 충격적인, 그렇기에 좀처럼 잊히지 않는 배드엔딩 작품이다. 감독은 고향에서 보낸 유년기를 떠올리며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용은 이렇다. 한적한 시골에서 나고 자란 어린 소년 둘, 타일러와 벤자민. 그 흔한 놀이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 둘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놀이를 즐긴다. 버려진 기차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길가의 나뭇가지로 지팡이를 만들고, 들판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씹으며 말이다. 이 한가한 소년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산 한가운데 덩그러니 방치된 채석장. 호기심이 동한 둘은 한창 콘크리트 충전공사 작업이 진행 중인 그곳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쯤 되면 예측이 되지 않는가. 누구 하나 제지해 줄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공사현장에서 벌어질 가장 끔찍한 일이.


2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그 안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이 잔뜩 담겨있다. 단짝 친구와의 친밀감, 장난칠 때의 놀람과 흥분, 갑자기 솟아오르는 궁금증과 긴장감, 그저 살짝 밀쳤을 뿐인데... 콘크리트 더미에 빠져버린 친구를 바라보며 느꼈을 간절함, 서서히 가라앉는 친구의 손을 붙든 채, 뒤이어 밀려오는 절망감, 분노, 무기력함, 그리고 결국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도망친 곳에 구원이 있을 리가>
그렇다면 도망쳐 버리자. 이 각박한 현실로부터. 대니 보일(Danny Boyle)의 2000년 작 ‘비치(The Beach)는 각박한 현실을 뒤로한 채,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소문의 섬으로 도피를 결심한 청춘들의 이야기다. 그 소문의 출처가 마약에 찌든 얼간이라는 점과, 종이쪽지에 제멋대로 그려진 조악한 지도 한 장 믿고 먼 길을 떠난다는 점이 영 시원치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도망친 곳에 구원이 있을 리가. 그들은 현실이 각박해진 가장 큰 이유가 인간이었음을 잠시 잊고 있었던 걸까. 그들이 과거에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의 소설 ‘파리대왕(1954)’을 단 한 번이라도 읽었더라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고립된 아이들이 그들만의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모하는지를 미리 지켜봤다면 좋았을 텐데. ‘비치’도 이런 ’파리대왕‘의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낙원의 섬 속에 형성된 또 다른 인간무리에게 호되게 당한 '리처드(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결국 탈출에 성공하지만 꿈꾸던 유토피아에 대한 배신감과 인간에 대한 염증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터.


<어차피 현실은 배드엔딩 하지만>
앞서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는 비극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하지만 이 둘의 관점은 정반대다. 비극 속 공포와 연민에서 피어나는 ‘카타르시스’를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체는 전적으로 관객이다. 즉, 비극과 거리를 두고 ‘구경’하는 쪽에 가깝다. 이에 반해 니체의 비극은 좀 더 현실에 깊게 침투되어 있다. 비극적 예술 속 주인공들이 운명을 극복하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심연과 숭고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됨으로써 말이다. 다시 말해, 극장 밖을 나선 인간들의 실제 삶에도 부단히 영향을 끼친다는 것. 배드엔딩 작품을 보고 난 뒤 느껴지는 뒤숭숭한 기분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관조와 용기가 뒤섞인 그 기분의 정체는 영영 알 길이 없다.
Editor / 주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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