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
최선의 연애 상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최악의 연애 상대는 왠지 하나로 귀결되는 듯 보인다. 처음에는 끔찍이 잘해주길래 좀 가까워지는가 싶었더니, 하루아침에 냉랭해지고, 웬일인지 연락이 점점 뜸해지다가, 조그만 실수에도 당장 헤어지잔 말부터 꺼내고, 공감은 커녕 모든 문제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는 것만 같은 연인. 그래, 다 그렇다 치자. 근데 애정표현 마저도 인색해버리니 상대는 피가 마르지 않겠는가.
<회피형이라 쓰고 빌런이라 읽는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겠지만 요즘 떠도는 연애썰들 사이에선 자주 출몰하시는 유명한 부류들이다. 웹 상에서 이들은 ‘회피형’이라는 명칭으로 통하는데, 각종 포털 및 SNS 피셜 최악의 연애 상대이자, 직장 상사, 동료, 심지어 가족으로써도 최악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과장이 아니다. 검색창에 회피만 쳐도 간증글이 쏟아져 나오니까. 게다가 댓글들도 살벌하다. “지금이라도 헤어진 게 다행이다, 회피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마라, 우리는 보험이 아니다, 조상신이 살린 거다.”.. 등등. 아니, 근데 이 정도라고?
그렇다면 회피형의 입장도 한 번 들어보자.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회피형의 기이한 행동 패턴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냉랭하고 차가운 태도 + 밥 먹듯이 동굴로 들어가 버리는 그들의 근본엔 사실 타인의 사랑과 수용을 간절히 갈구하는 마음이 숨어있다는데. 이거 참, 앞뒤가 안 맞다. 그럴 거면 애초부터 적극적으로 관계에 동참하고 함께 돈독한 시간을 쌓아가면 될 것 아닌가. 근데 막상 타인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는 어쩔 땐 소름 끼치도록 무심하다. 분명 해결해야 할 있는 일이 있는데도 대놓고 연락을 씹어버린다거나, 마땅한 이유가 없어도 급잠수를 타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라고 하니.

이쯤 되면 그들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개인의 성격, 나아가 정신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대상의 과거는 단서들의 데이터베이스나 마찬가지다. 역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건 어린 시절의 경험, 특히 ‘거부’와 관련한 경험이다. 회피형의 성장 과정 속엔 아이라면 응당 받아야 할 사랑 넘치는 피드백 보단, 거절과 억압 같은 부정적 기억들이 많다.
그렇게 당시 받았던 충격과 상처들이 차츰 쌓여가고, 훗날 회피를 촉발하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의 냉담한 태도나 친구의 배신, 연인으로부터의 비난 등 가까운 사람과의 불편한 사건들 말이다. 이런 나쁜 기억들은 자연스레 나쁜 감정들을 낳고, 그 감정들이 반복적으로 축적되며 ‘친밀해지면 상처받게 된다’는 공식으로 점차 굳어진다. 바로 이것이 회피형의 민낯이다.

뭔가 짠한 구석도 있다. ‘아직 입지도 않은 상처’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감당하기 힘든 감정적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시키지도 않은 ’거리 두기‘를 굳이 실행하는 회피형의 모습이. 그렇다. 결국 회피형의 근원엔 ’관계로부터의 불안‘이 깊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해한다. 그러나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하필 ‘회피’란 몹쓸 행동을 선택한 게 문제다. 그럼 당신은 어떠한가? 주변에 빌런이 없다면, 내가 빌런이란 말을 곱씹으면서… 아래의 항목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1.거절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을 갖고 있다.
2.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집착한다.
3.대인관계 형성이 어렵다.
4.은둔적인 생활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5.사람을 대하는 직업이 맞지 않는다.
6.수치심과 놀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다.
7.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이 열등한 사람인 것 같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회피성 성격장애 항목을 재구성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잖아>
나야 물론 당신이 무사하길 누구보다 바라지만, 혹시 공감 가는 항목이 꽤 많다 해도 너무 걱정은 말아라. 지금부터 소개할 이 사람보단 당신이 무조건 몇 백 배 나을 테니.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가로 세로 1미터, 높이 1미터 30센티미터 전후의 빈 골판지 상자를 뒤집어쓰고 산다. 매일매일 하루 종일. 머리부터 푹 넣으면 허리 부근에 딱 떨어지는 적당한 크기에, 상자 내부엔 철사로 만든 고리를 끼워 라디오와 물컵, 보온병, 손전등, 수건까지 걸어둔다. 외출할 땐 비라도 맞을까 비닐을 씌워 정비하고,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접착테이프로 모서리를 꼼꼼히 봉쇄한다. 시야 확보도 문제없다. 높이 20센티, 좌우폭 40센티 정도의 ‘엿보기용 창’을 뚫고 그 위에 무광택 비닐막을 씌워두면 된다.

아베 코보(安倍公房)의 소설, ‘상자인간(箱男, 1973)’에 등장하는 이 ‘남자’는 이름도 소속도 없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란 그가 전직 카메라맨이었고, 현재 상자를 뒤집어쓴 채 모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전부다.
“한 번이라도 익명의 시민을 위한 익명의 도시, 문이라는 문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전부 막힘 없이 열려 있고, 타인들끼리라도 특별히 몸을 도사릴 필요 없이, 물구나무서서 걷건 길가에서 곯아떨어져 자건 책망을 듣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 세우는 데 특별한 허가도 필요 없으며, 노래를 잘하면 아무리 멋대로 불러제껴도 자유고, 그것이 끝나면 언제라도 저 좋을 때 무명의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거리 - 를 그려보고 꿈꿔본 적 있는 자라면, 남의 일이 아니다.”
-아베 코보, 상자 인간 中

<불안을 해소하는 최선의 방식>
남자는 대체 왜 상자 속으로 들어갔을까. 상자 밖은 위험해서? 아니다. 그곳엔 파란 하늘이 있고, 푸르른 나무가 있고, 새가 지저귀고, 익숙한 일상의 풍경도 남자에겐 소소한 위안이다. 문제는 그 속에 우글대는 ‘인간’이다. 남자는 말한다. ‘보는 행위에는 사랑이 있지만, 보이는 행위에는 증오가 있다. (...)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보기만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보이던 자가 그 시선을 맞받아 응시하면, 이번에는 보던 자가 보이는 쪽이 된다.’ 상자인간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일이다. 남에 눈에 띄는 순간 자신은 기어코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기에. 뒤이어 온갖 기준을 충족시켜야만 한다는 압박과 끝내 실패하리라는 막연한 불안도 닥쳐올 것이기에.
조금만 견디면 되는데, 보통만 해도 되는데. 하지만 남자는 상자인간이 되는 것으로 이 불안을 해소한다.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자신도 없고, 그에 따르는 평가와 비난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고, 이 지경이 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치욕과 패배감조차 견뎌낼 수 없기에, 그는 차라리 제 손으로 사회에서 열외 되는 쪽을 선택한다. 상자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 아니 존재‘해야만 하는’ 인간. 남자에게 회피는 이제 삶의 조건이나 다름없다. 타인과의 관계 가능성은 상자 밖으로 저만치 밀어낸 채, 그렇게 ‘있는 인간’은 ‘있으나마나한 무언가’로 변모한다.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그저 ‘육교 밑이라던가 공중변소와 가드레일 사이 같은 곳에 끼어 있어, 꼭 쓰레기처럼’ 보이도록. 이 얼마나 무해한 방식인가.
<먹지 마>
그러나 단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다행일 순 없다. ‘이식증(Pica)’이란 신선한 소재로 관객을 충격에 빠뜨린 영화 ‘스왈로우(Swallow, 2019)’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병의 증상은 예상보다 심각하다. 한두 번 호기심으로 이상한 걸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적어도 1개월 이상 음식이 아닌 것을 지속적으로 섭취해야 하며, 이 행위가 대상자의 발달 수준에 비추어 볼 때 부적절해야 한다. 즉,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물질들을 복용(?) 해야 하는 것이다. 이식증 환자들이 가장 흔히 섭취하는 비식품으로는 흙이나 점토, 분필, 종이, 비누, 머리카락까지 매우 다양하다. 환자 중 일부는 철분 결핍성 빈혈과 같은 영양 결핍을 갖고 있다는 썰도 떠돌지만, 병의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순 없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식증 항목 참고)

‘스왈로우’의 주인공 헌터(헤일리 베넷)는 겉보기엔 남부럽지 않은 결혼 생활을 즐기고 있다. 성실하고 다정하며 사회적 성공까지 이룬 남편에, 시댁은 어마어마한 재력가 집안, 궁궐 같은 저택과 완벽한 아침식사, 침실 커튼을 열면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까지. 그러나 톨스토이(Tolstoy)가 말했듯 불행한 가정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 따뜻한 미소를 가진 남편은 헌터 보단 바깥일에 정신이 팔려 있고, 영혼 한 톨 안 담긴 기계적 리액션에, 귀족 시댁 식구들에겐 줄곧 외모와 품행을 지적당하는 게 실상이다. 뼈대 있는 집안에 며느리라면 마땅히 치러내야 할 관문일 수 있겠으나 헌터에겐 뭔가 벅차다.

증상의 시작은 헌터의 임신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였다. 드디어 이 냉랭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헌터의 맘은 들뜨지만 그녀의 바람은 곧 산산이 부서진다. 그저 축하한다는 짤막한 인사가 전부, 식사 내내 대화 속엔 헌터가 끼어들 틈은 조금도 없다. 그녀는 갑자기 물컵 속에 담긴 얼음을 손으로 집어 들고는 맹렬히 씹기 시작한다. 으드득하는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될 정도로, 강박적으로 씹고, 또 씹는다. 마치 얼음 씹는 소리로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그동안 억눌렸던 발화욕을 이윽고 터트려버린다. 이는 빙섭취증(Pagophagia), 즉 얼음에 비정상적 식탐을 보이는 이식증의 일종으로 보인다. 또한 실제로 이식증이 임산부에게서 자주 관찰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빙섭취증, DSM-Ⅳ: 이식증)

<삼키지 못할 것들을 삼킴으로써>
이후 헌터의 기괴한 식탐은 더욱 발칙해진다. 첫 도전은 매끄럽고 둥그런 구슬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 안으로 밀어 넣고 단숨에 꿀꺽 삼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는 자신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해 배설된 구슬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우선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가장 컸겠지만, 가슴 한 켠엔 이러한 생각도 있었다. 내가 이 위험천만한 일을 해내다니! 스스로가 얼마나 만족감이 컸는지, 잠들기 전 곁에 누운 남편에게도 의미심장한 고백을 날린다. ’나,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 물론 이유는 말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압정, 건전지, 읽던 책의 페이지, 반지와 자물쇠 등 보통 사람이라면 겁이 나 상상조차 못 할 것들을 그녀는 부지런히 삼키기 시작한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진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도 모자라, 가족 모두가 그녀의 비밀을 알아채게 되고 만 것이다. 밀려오는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헌터. 하지만 헌터의 마음보단 집안의 핏줄이 우선이었다. 남편과 시댁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감시와 감금이라는 강압적인 조치를 취한다. 감시자가 곁에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헌터. 창살 없는 감옥 속에서 그녀는 더욱 강렬하게, 이식의 유혹에 이끌린다.
삼키지 못할 것들을 삼킴으로써 그녀가 얻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소한 일탈이라고 보기엔 너무 위험하고, 주변인들을 향한 반항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약하며, 죽음을 향한 시도라고 보기엔 너무 모호하다. 오히려 그것은 발산하지 못한, 그렇다고 감당하기엔 버거운 감정의 파편을 자기 몸 안에 은밀히 은닉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마치 내 존재가 이대로 묵살당할 것만 같은 치명적인 불안 속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몸, 단 하나뿐 이었으니. 그녀는 자신을 해치는 순간마다 살아있음의 안도를 맛보는 묘한 굴레 속에 얽혀버린 건 아닐까.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다면>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불안 속에는 이미 해결의 방향을 가리키는 징후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좀처럼 그 힌트를 발견하지 못한다. 일단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 자체가 버겁고, 때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저마다의 우회로를 만들어낸다. 나쁜 놈이란 낙인을 감수하면서까지 철저히 거리를 두거나, 영영 상자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절대 삼켜선 안 될 것을 굳이 삼키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끝엔 아픔, 그러다 결국 병이 되어버린 상처의 수많은 잔해들이 뒤엉켜 있다. 여기엔 어떤 대단한 용기나 굳은 의지도, 사랑도, 위로도, 거창한 이해도, 집요한 분석도 필요 없다. 그것들은 끝내 불안 앞에서 무력해 지고 말테니까. 필요한 건 오히려 불안을 영영 뛰어넘지 못하리라는 체념이다.
이러한 포기가 곧 불안과의 공존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니.
Editor / 주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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