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아카이빙으로 바라본 ‘폐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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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이 가라앉은 특정한 장소는 우리에게 색다른 감정을 선사한다. 슬픔과 공허, 쓸쓸함과 벅차오름이 동반된 감정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버려진 공간인 폐허를 ‘사연’이나, ‘개인의 역사’로 받아들일 때, 그 상상력은 배가 된다. 폐허가 예술사에 깊이 관여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다. 회화, 건축, 사진, 영화까지, 인간이 폐허를 양분 삼아 그 상상력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다양한 창작활동 아래 예술가들의 영감을 책임졌던 폐허는 오늘날 새로운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디지털 아카이빙으로 새롭게 태어난 ‘폐허의 기록’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도달한다. 전 세계의 버려진 건물을 소개하는 Desert & Abandoned Places(@deserted.places)부터 냉전 시대 당시 사회주의 국가의 독특한 건축물, 공원, 기념물을 소개하는 Socialist Modernism(socialistmodernism.com)까지. 서양의 크리에이터들은 잊혀진 건물을 재조명하며, 폐허 큐레이팅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떨까? 한국과 일본 역시 이러한 미학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라져가는 공간을 기록하고, 다시 해석하며, 또 다른 영감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폐허 아카이빙 사이트: Haikyo: Abandoned Japan>

일본은 ‘폐허 덕후’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폐허 탐방 문화가 엄연한 서브 컬처로 인정받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하나의 기호로 주목받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부터는 폐허 순례를 위한 동호회가 출현, 현재는 관련 책과 잡지까지 발행되고 있다. 그 사이에서도 Haikyo: Abandoned Japan(https://haikyo.org)은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폐허 아카이빙 사이트로 폐쇄된 놀이공원이나, 러브호텔, 숲속 오두막 등 일본 폐허에 관한 정보와 사진은 대부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사이트의 운영자가 일본인이 아닌, 프랑스인이라는 것. 운영자인 조르디 먀오(Jordy Meow)는 폐허 탐험 문화를 사랑하는 포토그래퍼로 일본 폐허가 가진 역사와 가치에 매료되어 이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체유기, 자살 현장을 지도에서: 오오시마 랜드>
앞서 소개한 사이트가 폐허 탐방 문화를 기반으로 운영된다면, 오오시마 랜드는 결이 조금 다르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오오시마 테루가 만든 사고 매물 정보 사이트로 사고 지역, 건물 및 사망자의 사인을 공유한다. 내가 구매한 집에 사망자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작 초기에는 운영자가 직접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 전역을 돌아다녔지만, 현재는 네트워킹 서비스를 제공해 이용자라면 누구나 사고 매물에 대한 정보를 투고할 수 있다.
역시 특별한 점이라면 사망자의 사인을 공유한다는 것인데, “회전문에 끼여 사망”, “심부전으로 인한 고독사” 같은 식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지도의 불꽃을 누르면 주택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나 화재 등 부동산 사고 이력에 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뜻하지 않게 폐허, 오컬트 덕후들의 온라인 탐방지가 된 오오시마 랜드는 책 출간, 방송 출연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폐허 덕후: 나무위키/폐건물/목록>
일본과 달리 한국은 특정 사이트보다, 나무위키의 폐건물 카테고리가 가장 정리가 잘 되어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등 해외의 정보를 모으는 것도 가능한 데다가, 행정구역 별로 치밀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웬만한 아키이빙 사이트보다 나은 수준. 폐건물/목록 – 대한민국 – (행정구역)을 선택하면 쉽게 원하는 지역의 폐건물 목록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아카이빙 사이트처럼 잘 찍은 사진은 없지만, 해당 건물의 로드뷰 제공과 빠른 정보 업데이트가 특징이다. 불특정 다수가 정보를 투고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오오시마 랜드와 닮아있다.



<개인이 바라본 폐허: 네이버 블로그/구름처럼>
디지털 아카이빙이란, 개인의 시선이 가장 진하게 담긴 편집물이다. 특정한 세계관에 몰두해 집요하게 기록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네이버 블로그 ‘구름처럼’은 아카이빙의 미학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나무위키나 오오시마 랜드처럼 여러명의 시선이 겹친 사이트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자신이 본 것, 들은 것을 착실하게 기록해 나간다.
지역과 건물 이름을 소개하는 단출한 제목과 다르게 양질의 사진과 정보로 구성된 그의 블로그는 폐허에 관심을 가져봤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가는 공간이다. 특히 직접 촬영하는 흑백 사진은 폐허라는 공간의 쓸쓸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댓글에서 다양한 기억들과 감상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의 블로그는 ‘폐허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 안에서 만나는 폐허의 미학>
단순한 콘텐츠 제작이나 부동산 중개 등 다양한 이유에서 출발했지만, 시작이 무엇이든 폐허 아카이빙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개인이 남긴 한 장의 사진부터 여러 사람이 함께 쌓아올린 정보의 집합까지. ‘폐허’라는 카테고리에 담긴 그들의 열정은, 공간이 가진 쓸쓸함마저 뜨겁게 달군다.
도시괴담처럼 회자되는 루머와 달리, 실제 폐허의 대부분은 법적 분쟁 끝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경우가 많다. 유튜버든, 예술가든, 직접 발걸음을 옮기고 싶다면 관리자의 허가가 필수다. 그게 번거롭다면 폐허 덕후들이 남긴 ‘디지털 아카이빙’을 즐기면 된다. 집 안에서 마주하는 ‘폐허의 미학’. 그 속에 빠져들다 보면, 당신도 모르게 상상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른다.
Editor / 권혁주(@junyakimchin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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