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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가장 정직한 재료다. 계절을 달리하며 아카이브를 쌓아온 브랜드 EENK는 그 흐름 위에 단단한 기준과 태도를 세워왔다. 디자이너 이혜미는 단호함과 유연함 사이에서 브랜드의 세계를 확장해 왔다. 클래식과 동시대의 균형, 트렌드에 기울지 않는 중심, 그리고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고집. 그 모든 선택엔 ‘지금’보다 ‘지속’을 향한 태도가 담겨 있다.

10년 넘는 회사 생활을 지나 자신의 이름으로 브랜드를 론칭한 후, 파리에서 여섯 시즌을 채운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시험 중이다. 크리에이티브란 결국 얼마나 오래 해낼 수 있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언제까지 가능할까’라는 질문 앞에서 그는 다시 손으로 원단을 묶는다. 이번 시즌, 김수자 작가의 ‘보따리’처럼 감정과 정체성을 하나하나 짜내며 옷을 만든다. 그 결에, 하나의 브랜드가 살아남는 방식과 한 사람의 삶이 겹쳐진다.

EENK / ⓒfake magazine

Q. 간단한 자기소개와 운영하고 있는 브랜드 ‘EENK’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A. 저는 EENK의 디자이너이자 디렉터이자 CEO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인쇄소를 운영하셔서 늘 활자와 잉크 냄새에 익숙했고, 시각 자료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컸어요. 패션에 관심 많았던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고요.

처음엔 공학을 전공했다가 패션으로 전향했고, 한섬, 삼성, 코오롱 등에서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등 다양한 영역을 경험했습니다. 브랜드 론칭과 소재, 기획, 마케팅 등 여러 파트를 거치며 폭넓은 업무를 경험했고, 그 시간을 통해 패션 산업을 입체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패스트패션과 SNS의 급성장 속에서, 순간의 소비보다는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고, 그렇게 시작한 브랜드가 바로 EENK예요. 브랜드명은 잉크(INK)에서 출발했고, 제 이름 철자의 ‘I’를 ‘EE’로 바꿔 넣어 저만의 감성과 아이덴티티를 담았습니다. EENK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취향과 문화, 스토리를 공유하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의 가장 큰 차별점은 ‘Letter Project’ 예요. A부터 Z까지 알파벳 키워드를 중심으로 컬렉션을 전개하는 방식이자, EENK의 취향을 공유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글로벌 브랜드로 거듭나기 위해 해외 활동을 늘려가고 있는데, SS23 ‘W for W.W.W’ 컬렉션을 시작으로 FW25 ‘B for Binding’까지 총 여섯 차례의 컬렉션을 파리 무대에서 선보이고 있고, 파리의 프렝땅 백화점, 미국의 노드스트롬, 홍콩의 레인 크로포드, 일본의 유나이티드 애로우, 한국의 분더샵, 신세계 백화점 등 여러 공간에서 고객을 만나고 있어요.

EENK는 무엇보다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 타임리스한 아름다움을 EENK의 핵심 가치로 두고 브랜드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EENK / ⓒfake magazine

Q. EENK 이전, 국내 패션 대기업에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왔다. 패션 대기업의 커리어를 기반으로 국내 패션 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 경험 덕이 였을까 EENK는 지금 국내·외 다양한 곳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EENK 설립 이전과 이후 평소에도 해외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시선으로 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A. 직장 생활을 10년 넘게 했어요. 지금처럼 ‘워라밸’이나 직장을 ‘선택’하는 문화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이었죠. 주어진 일에서 성과로 증명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래야 다음 기회도 주어졌어요. 그때의 경험은 지금도 제 일하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어요.

회사에서 기본기라는 걸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효율, 시간 관리, 합리적인 사고 같은 것들이요. 특히 “같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실력이 달라진다”는 말을 좋아하는데, 그 기준이 지금도 제 업무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어요.

해외 문화에 대한 관심은 예전부터 있었어요.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편집숍, 미술관, F&B 매장을 빠짐없이 찾아다녔고, SNS가 없던 시절이라 스스로 조사해 프린트한 자료를 들고 다니기도 했죠. (웃음)

패션 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패션을 단순히 옷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트와 문화로 대하는 태도였어요. 그런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금의 브랜드에도 녹아들었고, 지금도 글로벌의 본질은 결국 그런 태도와 감각에서 온다고 믿어요.

Q. EENK의 디자인은 시간의 결을 넘나드는 듯한 클래식함과 현대적인 감각이 공존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트렌드를 쫓기보다 EENK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리고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이 있다면?

A.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인데,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하지만 그건 제가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늘 고민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이기도 해요.

트렌드를 완전히 무시하면 시대와 단절된 느낌이 들고, 반대로 매 시즌 트렌드만 쫓으면 브랜드의 정체성이 약해지죠. 결국 중요한 건 균형입니다. 트렌드를 의식하되, 기대는 않는 태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EENK만의 방향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컬렉션을 만들 때는 항상 동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안에 브랜드만의 언어를 더하려고 해요. 큰 틀은 클래식한 무드에서 시작해, 동시대적인 감성과 우아한 판타지를 덧입히는 방식이죠. 익숙한 아이템에 낯선 디테일을 넣거나, 고전적인 실루엣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식이에요.

또, 컬렉션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완성된 후에는 도취되기보다는 부족한 점을 반성하고 개선할 부분을 다시 고민하는 편이에요.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밸런스’예요. 소재, 실루엣, 컬러, 패턴 등 모든 요소가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결국 브랜드의 완성도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방향성이 분명해야, 트렌드도 의미 있게 녹아들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난 잉크의 색을 입힌 고전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인 스타일, 시간이 지날수록 차곡차곡 쌓이는 아카이브와 히스토리, 그리고 브랜드의 스토리를 함께 만들어가는 크루들의 팀워크. 이런 것들이 모여 EENK의 정체성이 된다고 믿고 있어요.


Q. 평소 라이프스타일에 있어서도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패션 외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인가? 음악, 영화, 공간, 혹은 본인만의 루틴이나 리추얼이 있다면 공유 부탁한다.

A. 사무실에서 일할 땐 늘 음악을 틀어놔요. 의식하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는 음악을 발견하는 기쁨을 즐기는 편이에요. (웃음)

예전에는 일부러 영감이 될 만한 영화를 찾아보곤 했는데, 요즘엔 OTT 콘텐츠를 거의 매일 챙겨보는 루틴으로 바뀌었어요. 그날의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미술관, 서점, 빈티지 숍은 반드시 들러요. 지도엔 도시별로 별표가 수십 개씩이고,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에도 폴더별 저장 목록이 꽤 많아요. (웃음) 그런 정보에 대한 집착은 수백 번의 출장에서 생긴 습관이에요.

예전 회사 생활을 할 땐 오히려 일과 사생활이 더 명확하게 나뉘어 있었어요. (웃음) 퇴근 후엔 영화, 음악, 전시처럼 저만의 자극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정말 소중했죠. 그런데 브랜드를 운영하면서는 그 경계가 거의 사라졌어요. 요즘은 일부러라도 루틴을 만들려고 노력 중이에요.

최근엔 진짜 쉬는 날엔 핸드폰도 꺼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 날이 오히려 다음 리듬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밸런스라고 느껴요. 개인적으로는 오감으로 흡수하는 모든 경험이 결국 ‘기준’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요. 그중에서도 ‘눈으로 보는 것들’이 제일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EENK FALL/WINTER 2025 COLLECTION 'B for BINDING‘ / ⓒYouTube

Q. 이번 2025 FW 컬렉션 ‘B for Binding’ 컬렉션에서 김수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라, 그녀의 ‘보따리 프로젝트’나 공간을 확장하는 개념이 컬렉션에 녹아들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요소는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것을 패션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은 어땠을지도 궁금하다.

A. 파리에서 김수자 작가님의 전시 <To Breathe – Constellation>을 보고 큰 울림을 받았어요. 실과 바늘을 회화의 도구로 쓰고, 캔버스를 무한한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개념이 저희 브랜드와도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죠. 작가님의 보따리 작업처럼, 평면적인 천을 겹겹이 쌓고 묶어 입체화하는 방식은 결국 옷이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과정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이번 컬렉션엔 책장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디테일, 여러 아이템이 결합된 구조, 보자기에서 영감을 받은 드레스와 매듭 백 등을 담았어요. ‘바인딩’이라는 키워드를 단순한 물리적 묶음이 아니라, ‘포옹’의 의미로 해석해 옷이 스스로를 감싸 안아주는 따뜻한 감정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님을 직접 뵈었을 때 느껴졌던 고요하고 단단한 분위기, 그 모던한 우아함을 컬렉션 전체 무드로 가져가고자 했어요. 저는 컬렉션마다 특정 ‘존재’에서 받는 에너지와 아우라를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New York Fashion Week-Concept Korea / ⓒYouTube

Q. 지금까지 진행한 협업 중에서 가장 도전적이었거나, 예상과 다른 결과로 흥미로웠던 경험이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 패션이 아닌 전혀 다른 분야와 협업할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A. 팬데믹 시절,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프로그램을 통해 뉴욕 패션위크에 디지털 필름으로 참여했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이옥섭 감독님, 구교환 배우님, 정려원 배우님과 함께했는데, 시나리오부터 촬영까지 짧은 시간 안에 마친 게 정말 경이로웠어요. 현장의 집중도와 에너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요. (웃음)

그 작업이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만들어낸 결과였기 때문이에요. 컬렉션에서 받은 인상으로 시나리오가 나오고, 그 시나리오로 다시 우리가 이미지와 룩을 풀어내는 구조였죠.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영화 의상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요. 특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처럼 감각적인 창작자와 협업해보고 싶어요. 그분의 미장센, 감성적인 스토리텔링, 공간과 시각을 연결하는 방식은 제게 큰 자극이 돼요.

단순히 의상을 만드는 것을 넘어, 감각과 감각이 만나 하나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저에게 정말 큰 매력으로 다가와요. 협업이라는 건 옷을 디자인하는 행위를 넘어서, 서로의 감각이 만나 완전히 새로운 결과물이 탄생하는 그 지점. 저는 그게 협업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해요.

EENK / ⓒfake magazine

Q. 해외 패션 신에서 브랜드를 알리는 과정은 단순히 컬렉션을 내놓는 것 이상일 것이다. EENK가 글로벌 무대에서 차별화되는 지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A. 결국,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로서 갖고 있는 고유한 스토리와 정체성, 그리고 그것을 매 시즌 새롭게 전달하려는 태도요.

반복되는 시즌 속에서 브랜드가 영속할 수 있는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할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아요. 지금은 하나의 컬렉션을 강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정보는 넘치고, 관심은 짧아졌으니까요.

그래서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순간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본질에 더 집중하고 현대적인 감각을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컬렉션을 만들 때마다, 스토리를 한 줄이라도 새롭게 써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어요.

파리 패션위크에 여섯 시즌 연속으로 도전하면서, 저 역시 한국 디자이너로서의 미학과 배경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됐어요. 글로벌 무대에서 차별화를 만들어내는 힘은 결국 ‘한국’이라는 출발점에서 비롯된 본질과 스토리라고 믿어요.


Q. 빈티지와 현대의 조합 그리고 섬세함까지 EENK의 뚜렷한 정체성은 패션 외에도 브랜드의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느낌을 준다. 앞으로 브랜드를 확장해보고 싶은 새로운 분야가 있다면? 가령, 패션을 넘어 라이프스타일, 공간, 혹은 전혀 다른 형태의 콘텐츠 또한 좋다.

A. 사실, 알파벳을 베이스로 한 'Letter Project' 자체는 호기심에서 시작됐어요.
한 가지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디자이너로서의 본능 같은 거였죠. 그래서 자신 있게 카테고리에 한정을 두지 않는다는 부연 설명도 붙이게 됐고요. 그런 이유로 패션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우먼 라인에서 맨즈 라인으로, 그리고 또 다른 카테고리로 확장해 오고 있어요.

2025 Pre-Fall부터는 ‘D for Denim’, ‘E for Essential’, ‘K for Knit’, ‘S for Signature’처럼 알파벳별 라인을 더욱 구체화할 예정이에요.
이 프로젝트 안에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이, 저희 브랜드의 유연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처음 기획했던 대로, 패션을 넘어 뷰티, 문화, 라이프스타일, 공간, 가구, F&B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웃음)

EENK / ⓒfake magazine

Q. 한국 패션이 점점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K패션이라는 키워드로 정의되기보다, 개별 브랜드의 색이 중요해지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디렉터의 시선에서 한국 패션 시장이 가진 가능성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A. 저도 요즘 그 고민을 가장 많이 해요. 브랜드가 커질수록 ‘이 일을 언제까지 내가 디렉팅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경영자로서 브랜드를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미우치아 프라다나 레이 가와쿠보 같은 인물이 자주 떠올라요. 후배를 잘 키우면서도 브랜드의 정체성은 지키고, 자신은 조율자이자 조언자로서 전체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인상 깊어요. EENK도 그렇게 지속 가능한 구조로 성장하길 바라고 있어요.

지금 한국 시장은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한쪽에선 마니아층이 브랜드의 맥락을 깊이 이해하고 소비하고, 다른 한쪽에선 실용성과 가격 중심의 캐주얼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죠. 이 두 흐름이 공존하며, 양극화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중요한 건 브랜드가 얼마나 꾸준히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해 갈 수 있느냐예요. 정보와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 결국 기억에 남는 건 브랜드의 본질이에요. 앞으로는 유행보다 취향을 선택하는 소비가 더 강해질 거고, 그런 흐름 속에서 브랜드가 자신만의 색을 지키며 팬덤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디자이너 이혜미로서, 그리고 EENK라는 브랜드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A. 희로애락을 통해 느끼는 행복.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채우고, 결이 맞는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완성해 가는 것. 그 과정에서 팀워크를 만들고, 함께 성취를 경험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인생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재에 늘 감사하고, 현재보다 후퇴하지 않는 유지와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는 삶을 꿈꾸고 있어요. (웃음)

“나의 오늘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말을 좋아해요. 그 말처럼, 지금의 진정성과 노력이 쌓여 브랜드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이 되었으면 해요. 어느 순간부터는 ‘얼마나 멋진 옷을 만들까’보다는 ‘이 일을 얼마나 오래할 수 있을까’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꾸준함과 지속 가능성이 지금의 제게는 더 큰 목표가 된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는, 변화하는 트렌드의 굴레와 진화하는 패스트패션 사이에서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더해지는 브랜드. 누군가의 아카이브 속에 오래 남을 수 있는 브랜드.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난 글로벌 하우스 브랜드로 성장하는 것. 그 여정을 향해 지금도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Q. 국내에도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과 브랜드가 생겨나고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업의 꿈을 놓지않고 있는 이들이 있다. 학생부터 디자이너, 그리고 과정을 겪어가며 성장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A. 말려요. (웃음) 실제로 그런 질문을 자주 받아요. “졸업하고 바로 브랜드를 시작할까요, 아니면 회사 경험을 먼저 쌓을까요?”라는 질문이요. 그럴 때마다 저는 꼭 회사부터 다녀보라고 조언해요.

요즘 세상은 정말 만만치 않아요. 경쟁자도 너무 많고, 누구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될 수 있는 시대잖아요. 하지만 그럴수록 실력에 대한 검증은 오히려 더 냉정해졌어요. 브랜드를 시작해서 1~2년 버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3년, 5년, 10년을 지속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거든요.

한국에는 매년 수천 개의 브랜드가 생기고 사라지는데, 진짜로 살아남으려면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부족해요.

지금은 모두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예요. 유튜브, 인스타그램, 다양한 플랫폼들이 존재하는 이 시대는, 표현의 가능성과 동시에 냉정한 실력 검증의 시대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기초 체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원하지 않는 일도 해보고, 조직 안에서 훈련받고, 책임져본 경험이 있어야 내 브랜드의 무게도 감당할 수 있거든요.

패션은 단지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결국 사업이고, 시장이에요.
브랜드를 시작하면, 크리에이티브보다 경영적 책임이 훨씬 더 크게 따라오고요. 그 무게를 견디려면 단단한 기본기가 꼭 필요해요.

그게 제가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하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조언인 것 같아요.

EENK / ⓒfake magazine

Q. ‘fake’의 의미를, 목적을 달성한 모습을 더욱 매력적으로 표현해 주는 행동이나 태도로 재해석하였다. EENK에게 ‘fake’란?

A. 저에게 ‘fake’는 오히려 아날로그에 가까워요. 아날로그에 너무 익숙한 세대라 그런지, 손으로 만드는 방식이 더 애틋하게 느껴져요. 제가 그렇게밖에 못해서이기도 하고, 그게 곧 저라는 사람의 결과물이기도 해요. (웃음)

EENK는 지금도 손 도식화, 손 패턴, 핀업, 라인 테이프, 가봉 수정 같은 아날로그 프로세스를 고집하고 있어요. 시즌마다 핸드메이드 피스를 꼭 만들고, 종이를 더 자주 만지죠. 물론 이 방식은 시간이 훨씬 더 걸려요. 하나의 옷을 완성하기 위해 패턴을 네 번, 다섯 번, 많게는 여섯 번까지 수정하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옷은 결국 손의 감정을 담고 있어요. 입는 사람도 그 온도를 느낄 수 있다고 믿어요.

물론,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순간도 있어요.
하지만 브랜드가 성장하면서 그 과정을 알아봐 주는 사람도 늘고, 그럴수록 더 잘해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그런 반복이 쌓여 지금의 저희 페이스가 만들어졌어요.

디지털 기반의 프로세스가 대세인 시대에서, 이런 아날로그 방식은 어쩌면 저희 브랜드만의 ‘페이크’일지도 몰라요. 겉으로 보기엔 비효율적일지 몰라도, 가장 저희답고 가장 진짜 같은 방식이니까요.

그래서 저에게 ‘fake’라는 단어는 오히려 더 진짜 같은, 아주 인간적인 방식으로 다가와요. 지금도 저희는 그렇게, 시간을 아주 많이 쓰는 브랜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