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리가 만드는 파동

밴드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기록

<골목의 시작>

상수역을 나서, 극동방송 길을 건넌다. 다다른 골목에서 기타 소리가 얇게 흘러나온다. 바람에 실려온 건 오늘 공연의 리허설일 것이다. 저녁 공기 속에는 먼지와 기름 냄새, 사람들의 발걸음이 섞여 있다.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전봇대와 입간판, 그 위에 내가 좋아하는 밴드 이름이 굵게 박혀 있다. 오늘 처음 듣는 이름도, 몇 번이나 봐온 이름도, 이 골목에서는 모두 자연스럽다.

이 길을 걸을 때면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몸이 조금 달아오른다. 조금 뒤, 나를 기다리는 건 스피커의 울림과 무대의 빛, 그리고 사람들의 숨소리일 것이다.

ⓒClub FF

<계단 아래의 세계>

FF 입구 앞,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벽돌 위로 검게 칠한 페인트가 오래돼 벗겨져 있고, 그 위엔 포스터 대신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나 여기 다녀갔다’는 흔적처럼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스티커들. 그리곤 벽 한쪽에서 빌리가 나를 쳐다본다. 낯설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시선을 지나, 문틈 사이로 베이스의 ‘웅-’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 울림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날 그 무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심장이기도 하다. 문을 열자마자 드럼이 박자를 맞추는 ‘둥둥, 딱딱’ 소리가 귀를 메운다. 안쪽은 따뜻하고, 조금은 습하다.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스치며 자리로 들어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같은 소리를 기다리는 마음이 공기를 묶는다.

순간, 공연장은 깊은 숨을 쉰다. 기타가 첫 코드를 ‘딴-’ 하고 울린다. 그 소리는 단순히 시작의 신호가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한 번에 같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베이스는 바닥을 울리고, 드럼은 심장을 찌른다. 보컬은 첫 소절을 부르며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다. 관객들의 발끝이 리듬을 타고, 박자를 맞춘다. 앞줄에서 몸을 크게 흔드는 사람도, 뒷줄에서 눈을 감고 서 있는 사람도, 같은 열기 속에 있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경계는 사라지고, 같은 호흡만이 남는다.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해내는 사람들>

밴드의 길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 뒷면은 단단하고 거칠다. 낮에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밤에는 연습실에 갇혀 자신들과 싸운다. 비 오는 날 젖은 스틱 가방을 메고 대중교통을 타고, 잠깐의 무대를 위해 하루를 건다.

국카스텐이그랬고, 검정치마가 그랬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밴드들도 똑같다. 첫 자작곡, 첫 공연, 첫 앵콜. 관객이 몇 명이든,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시간을 걸어도 아깝지 않다. 그렇게 하나씩 해낸 것들이 모여 ‘밴드로 산다’는 말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최근 대형 페스티벌과 방송이 밴드 음악을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 바깥의 세계는 여전히 깊다. ‘Rolling Hall’, ‘Club BBang’, ‘Prism Hall’ 등 좁은 무대와 가까운 숨, 그리고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울리는 소리들. 그곳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은 관객의 수를 세지 않는다. 대신,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소리를 나누는 순간을 기억한다. 그 순간이야말로, BECK 속 장면처럼 청춘을 선명하게 만든다.

Guckkasten - Aug, 23, 2009 Club FF / ⓒYoutube

<골목의 끝>

마지막 곡이 끝나자, 관객들의 손이 공중에서 흔들린다. 앵콜을 외치는 목소리가 겹치고, 밴드는 다시 무대에 서서 짧은 웃음을 짓는다. 기타가 다시 ‘딴-’ 하고 울리고, 드럼이 ‘둥!’ 하고 받아친다. 마지막 에너지가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

계단을 올라 골목에 나오면 귀가 조금 먹먹하다. 하지만 그 진동은 여전히 가슴속에 머문다. 내일은 다시 평범한 하루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또 한 번 내 세상을 흔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단지 밴드의 소리가 아니었다. 나를 이 골목으로 이끈 모든 첫 소리, 이름 모를 무대의 울림, 그리고 그 안에서 부딪히던 숨과 숨의 온기였다.

혹시 밴드 신에 애정이 생겼다면, 그들의 숨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공연장을 한 번쯤 찾아가 보길 바란다. 좁은 무대와 가까운 시선, 빛이 스치는 순간, 그 속에서 당신도 모르게 발끝이 리듬을 타게 될 것이다.

작은 소리는 그렇게 또 하나의 첫 소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파동은 언젠가, 당신을 다시 이 길로 불러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