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를 벗어난 사람들> 어떤 실종의 특별한 이유

<좌표를 벗어난 사람들> 어떤 실종의 특별한 이유

5분의 1명꼴로 누군가 사라지고 있다.

2025년 기준으로, 하루 평균 실종 신고 접수는 약 275건. 과거에 비해 그 수가 감소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연간 7만 명 이상의 성인이 실종. 그중 매년 1,000명 남짓한 인원이 사망자로 집계. 충격이다. 스마트폰 하나면 서로의 위치에, 상태에, 얼굴까지 곧장 마주할 수 있는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매일 몇 명씩은 반드시 사라지고 있다니.


<닫힌 상자 속의 고양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의 역작,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론 세계관이 인간 세계의 적용되었을 때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사고 실험이다. 실험의 내용은 이렇다. 닫힌 상자 안에 방사성 물질과 독가스 장치, 그리고 살아있는 고양이를 함께 넣은 뒤 일정 시간 후 고양이의 생사를 판단한다.

#nautil.us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상 고양이의 죽음을 예측할 것이다. 하지만 양자론적 해석은 조금 다르다. 상자를 열기 전의 고양이는 살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 있는 상태, 즉 양자론의 핵심인 ‘중첩 상태’를 상징한다. 쉽게 말하면, 직접 관측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결과로 결정되지 않으며 여러 가능성이 겹쳐 있는 상태다. 결국 고양이의 정확한 생사 여부는 닫힌 상자 안에선 확정될 수 없다는 말. 이 난해한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대체 얼마나 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인가.


<사건이 아닌 상태>

이렇게 갑자기 슈뢰딩거의 이야기를 꺼낸 건, 실종의 독특한 성격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실종자들 역시 닫힌 상자 속 고양이처럼, 누군가에게 ‘발견’되기 전까진 아무도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없다. 짐작조차 어렵다. 그렇게 그들은 곁에 있다고도 동시에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 즉 유예된 존재로 우리 근처를 맴돈다. 허나 여기서의 불확정성은 절대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 남겨진 이들에겐 무한한 기다림을 강요하는 고문이자, 어쩌면 강력 범죄의 전조를 나타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종은 생사의 문제가 걸린 사건이기 이전에 관계가 보류된 채 지속되는 일종의 ‘상태’다.

나아가 실종이 상태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획일화된 패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살인이나 납치, 감금 등 실종자의 의지와 무관한 경우엔 즉각적인 수사로 이어질테지만, 은둔이나 가출 등 스스로의 선택인 경우엔 개인의 자유 혹은 사생활이라는 명목 아래 곧 사건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따라서 실종은 자의와 타의라는 경계 위에서 사건이 되었다가도, 동시에 사건이 아닌 것으로 변모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다.

여전히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는 '부산 부부 실종 사건 / #daum.net

<좌표로서 존재하는 인간>

이러한 상태가 더욱 기이하게 여겨지는 건 고도로 발달한 통신 환경과도 연관이 깊다. 통신 신호와 GPS, 데이터 기록 등 개인의 모든 활동이 끊임없이 가시화되어 기록되고 있는 지금, 현대의 인간은 좌표로서 존재한다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직접 접촉하는 원시적 방법 대신 기술의 힘을 빌린 접속으로 상대를 확인하고 신뢰한다. 그러나 실종은 이 촘촘한 좌표망을 이탈하는 일이다. 단순한 사라짐이 아닌, 사회가 인간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로부터 말이다.

#howstuffworks.com

<자발적 실종>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TV 시리즈, <맨헌트: 유나바머(Manhunt: Unabomber, 2017)> 속 테드(폴 베타니)는 앞서 언급한 자발적 실종의 극단적인 케이스다. 그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은 바로 8-9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폭탄 테러범 시어도어 카진스키(Theodore Kaczynski). 아마 대중에겐 유나바머란 별명이 더 친숙할 것이다.

어느 날, 미국의 한 대학에 우편물이 도착한다. 두 손안에 쏙 들어오는 가볍고 작은 종이 박스엔 알파벳 R이라는 짧은 메모가 적혀있을 뿐, 별다른 특이점은 없다. 어떤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박스는 목적지인 한 교수에게 무사히 전달된다. 그리고 홀로 남은 교수가 박스를 여는 순간 쾅! 폭발이 일어난다.

"내가 주소를 쓰면 그들은 복종한다. 당신 앞으로 온 소포가 도착하면 당신은 무조건 순종할 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한다." (맨헌트: 유나바머)

우편물 폭탄. 유나바머의 이 발칙한 수법은 의외로 평범하지만 그 무엇보다 정확하고 철저했다. 그는 ‘내가 주소를 쓰면 그들은 복종한다’는 대사처럼, 좌표로 사람을 판별하는(파악) 문명 시대의 규칙을 교묘히 이용한다. 덕분에 목표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17년 동안이나 계속된 총 16건의 테러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작품은 이러한 유나바머의 무자비한 테러에 대항하는 FBI의 프로파일러, 피츠(샘 워딩턴)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지금이라면 우편물 역추적을 통해 단숨에 검거했겠지만, 80년대라는 사건 배경을 고려하면 상황은 달라진다.게다가 상대가 아이큐 160 이상의 16살에 하버드에 입학한 수재라면 말이다. 유나바머는 헬기에도 포착되지 않는 깊은 산속, 직접 지은 오두막에서 독학으로 폭발물 관련 지식을 터득하고, 스스로 제작까지 해냈다.

제조에 쓰인 재료는 대부분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재활용한 것. 또한 폭탄엔 DNA가 발견될만한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았으며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일부러 가짜 증거를 심어두기도 했다. 이토록 치밀한 전략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위치, 즉 좌표를 노출시키지 않고서도 범행을 전부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KGW Vault: The Unabomber / ⓒKGW NEWS

<접속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런 완벽한 유나바머의 이면엔 한 인간으로서의 테드가 있었다. 테드는 그저 미치광이 테러리스트가 아닌, 신념을 가진 사상가로 인정받길 원했고 그 욕망은 자신의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경찰과 언론에 보내는 행위로 이어진다. 바로 이 편지가 테드를 검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테드의 글을 접해오던 가족들은 그만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한 문장들을 기억해 냈고, 법 언어학을 전공했던 피츠는 언어를 사용할 때 반복되는 표현과 실수들을 포착해 용의자를 테드로 확정해 낸다. 특히 마지막 테러 직전에 언론사에 보냈던 <산업 사회와 그 미래(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 1995)>라는 긴 글은 실제 단행본으로 정식 출판되었으며, 여러 석학들로부터 일정 수준의 논리적 완성도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언문 어디에도 미치광이의 작품처럼 보이는 부분은 없다. 그의 언어는 명확하고 정확하며 차분하다. 논증은 미묘하고 신중하게 전개되어, 정신 나간 사람이 내놓을 법한 허황된 주장이나 비이성적인 추측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 만약 이것이 미치광이의 작품이라면 장 자크 루소, 톰 페인, 칼 마르크스 같은 많은 정치 철학자들의 글도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_미국 정치학회 전 회장, 제임스 Q. 윌슨(James Q. Wilson) 출처: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실제 워싱턴포스트 지면에 실린 유나바머 선언문 / #pcmag.com

’산업 혁명과 그 결과는 인류에게 재앙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선언문의 핵심은 기술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기술 체제의 기제가 인간과는 맞지 않으며, 때문에 발전이 거듭될수록 인간 본성은 파괴되고, 끝내 기술에 종속된 노예로 전락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뒤이어 대중에게 세상을 장악한 산업-테크놀로지 체계의 전복을 목표로, 다시 원시 시대와 같은 자연으로의 복귀를  요청한다. 두서없어 보이던 테러의 타겟들도 기술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던 걸 보면, 테러라는 행위 역시도 이러한 선언의 일부였을 터. 결국 테드는 완벽한 단절의 위기에 놓인 인류를 구원하리라는 일념으로, 문명의 접속을 거부하고 원초적 접촉을 되살리기 위해, 제 발로 좌표를 벗어나는 ’자발적 실종‘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최악의 방법임엔 틀림없다.

#revistagq.com

<보이 A>

그렇다면 자의도 타의도 아닌, 생존을 위한 실종은 어떨까. 유나바머의 실종이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면, 존 크로울리(John Crowley) 감독의 영화 보이 A(Boy A, 2007)에서의 실종은 훨씬 절박하고 현실적인 목적을 지닌다.

“제가 제 이름을 지을 수 있대요.”

순진한 얼굴의 청년이 벅찬 표정으로 자신의 새 이름을 고민 중이다. 그렇게 선택된 이름은 잭. 이제부터 그는 잭이란 이름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려 한다. 대체 어떤 사연이길래.

#imdb.com

영화의 주인공인 잭(앤드류 가필드)은 10살 무렵, 친구인 필립(테일러 도허티)과 함께 같은 반 여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언론은 두 소년을 가만두지 않았다. 이에 법정은 신변 보호의 차원으로 이 둘에게 각각 ‘보이 A’, ‘보이 B’란 별칭을 붙여준다.

죗값을 치르기 위해 무려 14년 동안 보호시설에 수감되어 있던 보이 A, 잭은 24살의 청년이 되어 사회로 복귀한다. 그리고 이러한 잭이 일상에 무사히 섞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보호감찰사인 테리(피터 뮬란)의 역할이다. 둘은 10살의 극악무도한 살인범, 과거의 잭을 세상의 좌표에서 완벽히 지워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새 이름을 비롯해 새 고향, 새 거쳐, 직업, 가족까지...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서 잭이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테리뿐이다.

잭의 복귀는 예상외로 꽤나 수월했다. 직장 동료들과의 즐거운 나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애인, 시설에선 절대 만끽할 수 없었던 자유. 하지만 잭과 테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의 죄는 결코 지워질 수 없었다.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이 A'의 석방 소식을 기사 1면으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악마가 돌아왔다‘는 무시무시한 문구로 대중을 자극한다.

잭은 어느새 미디어를 도배한 자신의 소식 앞에서 섬뜩한 기분을 느끼지만, 걱정과 달리 주변의 어느 누구도 잭을 ‘보이 A'라 의심하지 않는다. 많이 변한 외모에 과거의 흔적도 말끔히 처리했으니.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가는 일상에 자연스레 적응해 가던 잭은 어느 날, 우연히 자동차 사고로 산속에 고립된 소녀를 구출하며 뜻하지 않은 영웅 대접을 받게 되는데.

#imdb.com

그렇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언론은 악마, 그리고 영웅을 가만두지 않으니까. 잭의 사진은 이제 악마가 아닌 영웅의 모습으로 세상에 뿌려진다. 유나바머가 글로써 자신의 익명성을 폐기했다면, 잭은 영웅의 이미지를 획득함으로써 다시 좌표 위에 소환된 셈이다.


<그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물론 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10살의 ‘보이 A'에겐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심한 따돌림, 부모의 방치와 학대, 주변의 무관심... 무엇보다 살인의 주도자가 친구인 ’보이 B', 필립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실을 견디지 못한 필립은 감옥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잭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평범한 삶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언론도, 대중들도 이 사실에 대해선 알려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알 필요가 있을까. 때문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잭의 천진한 얼굴과 잔혹한 행위 사이에서 고뇌한다. 그에게 과연 자유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저 좌표 밖에서, 묵묵히 실종 상태에 머무는 것만이 그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생존 조건은 아니었을까.

지우고 싶었던 잭의 과거 / #letterboxd.com

그럼 생각해 보자. 좌표와 데이터로 인간을 인식하는 문명 속에서, 실종은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비극일까. 혹은 좌표 밖에서 겨우 유지되는 또 다른 형태의 생존 방식일까.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실종은 사유의 대상으로 머무를 수 없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남겨진 이들의 고통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사라짐을 가리키는 징후와 언어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곁으로.





Editor / 주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