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말말(言馬末), 영화로운 말을 고르는 법

말말말

어느덧 2월 반, 2026년이 된 지 한 달하고 보름이 지나가고 있다. ‘병오년(붉은 말의 해)’인 2026. 그대들은 잘 보내고 있었는가. 연초에 계획을 했던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든, 그렇지 않든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올 한해의 목표와 꿈을 다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달을 돌아보며, 그리고 남은 2026년의 새로운 날들을 위해 이번 기획에서는 붉은 말의 해를 맞아 '말'과 관련된 영화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언어를 의미하는 말 (言)과 힘차게 달리는 동물을 의미하는 말 (馬), 그리고 끝을 의미하는 말 (末)까지. ‘말’이라는 단어가 가진 세 의미와 그 의미를 담은 세 영화들. 이것들을 통해 올 한해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말말말(言馬末), 영화로운 말을 고르는 법’을 소개한다.


“첫 번째 말(言):<결혼 이야기>: 뱉어낸 말과 삼켜낸 진심 사이의 온도”
<결혼 이야기 Marriage Story> · 노아 바움백 · 2019 · 코미디/드라마 · 미국 · 137분

<시작의 문장과 침묵의 벽>

에디터가 첫 번째 ‘언어로서의 말(言)’을 생각하며, 고른 영화는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이다. 언제나 사랑했던 한 부부의 결혼생활이 끝나면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과 그 안에서 크고 작게 움직이는 사랑을 담은 영화는 ‘이혼’이라는 아름다운 이별로 향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에게 ‘말’들을 들려준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뉴욕을 대표하는 연극 연출가 ‘찰리(아담 드라이버 扮)’와 촉망받는 드라마 배우였으나 찰리와 사랑에 빠진 후 커리어를 뒤로 한 채찰리의 극단에서 일하게 된 니콜 (스칼렛 요한슨 扮)’.

영화는 이들의 아름다운 말들로 가득 차 시작한다. 서로의 장점과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담담하게 읊조리는 찰리와 니콜. 니콜이 찰리의 꼼꼼함과 다정함을 사랑하고, 찰리가 니콜의 넘치는 에너지와 모성애를 존중한다는 그 고백들은 사랑한다는 단어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 하지만 비극은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토록 따뜻했던 문장들은 사실 이혼 조정실이라는 차가운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서로의 눈을 맞추며 읽어주어야 했던 편지는 굳게 닫힌 입술 뒤로 숨어버리고, 사랑의 언어가 침묵의 벽에 가로막히는 순간, 관객은 이들의 견고했던 세계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영화는 이 도입부를 통해 말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의미인 진심이 무너짐을 처절하게 조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Marriage Story

<가시가 된 말들과 가시 박힌 마음들>

그들이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배경에는 수년 동안 켜켜이 쌓인 말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시작된 결혼 생활은 시간이 흐르며 서로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무심한 말들, 혹은 꼭 필요한 순간에 삼켜버린 말들로 인해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니콜은 찰리의 천재적인 연출 세계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지워져 가고 있음을 느꼈고, 뉴욕을 떠나고향인 LA 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쌓고 싶다는 소망을 수차례 내비쳤다. 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성취에만 몰두했던 찰리는 니콜의 번호조차 외우지 못할 만큼 그녀의 내면에 무관심했고, 그녀의 절실한 요청을 그저 지나가는 투정으로 치부하며 논의 자체를 거부했다.

반면  찰리의 입장에서도 상처는 존재했다. 그는 니콜이 자신의 연극 세계를 누구보다 지지하고사랑한다고 믿었으며, 우리가 일구어낸 뉴욕에서의 삶이 가족 모두에게 최선의 행복이라 확신했다. 그랬기에 예고 없이 날아온 이혼 소장은 그에게 있어 말이 아닌 통보로 다가온 거대한 배신이었다. 함께 쌓아온 시간을 단번에 부정당한 찰리는, 자신이 이기적인 남편으로 규정되는 순간마다 당혹감과 억울함을 느꼈다. 니콜이 삼켜왔던 말들이 이혼 소송이라는 공격적인 언어로 변해 쏟아질 때, 찰리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가 자신을 파멸시키려 한다는 사실에 깊은 내적 상처를 입는다. 가장 가까운 사이임에도 타인보다 못한 소통의 벽은 니콜의 원망 섞인 말과 찰리의 방어적인 말이 되어 충돌한다. 한때 사랑을 맹세했던 입술은 이제 서로를 비난하는 언어들을 쏟아내며, 10 년의 세월을 상처의 기록으로 뒤바꾼 채 각자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Marriage Story

<날카로운 독설 끝에 남은 뭉뚝한 위로>

부부만의 원만한 합의를 꿈꿨던 초기의 다짐은 ‘승소’라는 목적을 가진 법정 대리인들의 개입으로 인해 추악한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된다. 그들의 평범했던 대화들과 일상은 변호사들의 입을 빌려 가공되었고, 그 말들은 상대의 치부를 공격하는 가시가 되었다. 그렇게 찰리와 니콜은 자신들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러운 적이 되어가는 과정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동안은 타인의 입을 통한 말들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이 갈등은 가장 사적인 공간인 찰리의 거실에서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서로의 상처를 느끼고, 대화로 매듭을 풀어보려 시작했던 자리는 순식간에 서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폭발적인 싸움터로 변한다. 찰리는 참지 못하고 "당신이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참혹한 저주를 내뱉고는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홧김에 내뱉은 이 독설은 결코 본심이 아니었음에도 공중으로 퍼진 순간 두 사람 사이에 거대한 도랑을 파버린다. 그리고 이내 ,그 날카로운 가시를 뱉은 찰리는 스스로 자리에 주저앉아 울게 된다. 가장 사랑하던 이에게 깊은 상처를 준 자신에게,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그는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자 니콜은 자신의 상처를 뒤로 한 채 찰리를 진심으로 위로해준다. 모든 것을 알기에, 사랑의 마음으로.

ⓒMarriage Story

<상실 뒤에 비로소 들리는 진심>

폭풍 같은 소송이 지나가고 관계의 끝에 도달했을 때, 영화는 마법처럼 비로소 삼켜두었던 진심을 꺼내어 놓는다. 아들 헨리가 우연히 발견해 서툰 발음으로 읽어 내려가는 니콜의 편지 속에는, 찰리가 그녀의 삶에서 가장 반짝이던 순간이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를 만난 지 2 분 만에 그와 사랑에 빠졌다"는 문장이 찰리의 귀에 닿는 순간, 파괴되었던 관계의 파편들은 기적처럼 다시 정렬된다. 그리고 적혀 있는 “나는 평생 그를 사랑할 것이다”라는 문장. 영화의 시작, 읽지 못했던 그 말들이 영화의 끝이 되어서야 다시 읽히고 그들의 사랑은 영원함을 보여준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 않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아들을 맡길 수 있으며, 서로의 신발 끈이 풀린 것을 발견하고 말없이 허리를 숙여 묶어줄 수 있다. 전화번호조차 잊고 살았던 서늘한 현실을 지나 도달한 이 마지막 언어들은, 말이 때로는 누군가를 죽이는 흉기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엔 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구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2026 년의 시작점에서 우리가 건네는 말 한마디가 상대의 하루를 무너뜨릴 수도, 혹은 다시 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증명하는 영화는 없을 것이다.

ⓒMarriage Story

“두 번째 말(馬) : <스트레이트 스토리>, 느리지만 정직하게 달리는 말”
<스트레이트 스토리 The Straight Story · 1999 · 전기/드라마 · 영국, 프랑스, 미국 · 112 분

<사랑하는 이을 향해 직선으로 뻗은 길>

두 번째 ‘동물을 의미하는 말(馬)’을 상징하는 영화로 에디터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소개한다. 몽환적이고 어딘가 이상한 세계를 만들어왔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지만, 이 영화는 그동안의 영화와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기괴하게 꼬아버린 몽환적인 세계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그의 직선적인 여정을 관객과 나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저 길을 향하는 한 ‘말’의 달리기를 보여준다.

보통 말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갈색 동물의 거침없는 속도와 화려한 질주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아이오와의 시골 마을에 사는 73 세 노인 앨빈 스트레이트 (리처드 판스워스 扮)의 질주는 그 어떤 질주보다 뜨겁고 단단하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딸과 함께 마을에서 살며, 세월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10 년 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형 라일 (해리 딘 스탠튼 扮)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는 화해를 위해 길을 나서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시력은 나쁘고 운전면허도 없는 그가 택한 운송 수단은 말도, 자동차도 아닌 낡은 잔디 깎기 기계였다. 앨빈은 그 뒤에 작은 트레일러를 매달고 시속 8km라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지르는 무모한 질주를 시작한다.

ⓒThe Straight Story

<길 위에서 만난 단단한 말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젊은 말처럼 근육질의 활기찬 에너지가 솟구치지는 않지만, 붉은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묵묵히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앨빈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고결한 ‘붉은 말’의 기품을 자아낸다. 영화의 제목이자 그의 성(姓)이기도 한 ‘스트레이트(Straight)’라는 단어는, 굽이치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만 밀고 나가는 그의 정직한 생애를 대변한다. 시속 8km의 느린 여정은 오히려 그에게 주변을 깊게 응시할 시간을 허락하고, 길 위에서 마주치는 타인들의 삶에 말발굽 같은 깊은 자국을 남기게 한다.

그 중에서도 어두운 밤,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가출 소녀와의 대화는 앨빈이라는 한 마리의 말이 타인의 생에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의 순간이다. 임신한 사실을 가족에게 숨긴 채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소녀의 불안한 눈빛 속에서, 앨빈은 자신이 지나온 수많은 후회와 깨달음을 발견한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그녀와 음식을 나누며, 인생이라는 긴 길 위에서 우리가 왜 혼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가족은 묶어 놓은 나뭇가지와 같아. 한 개는 부러뜨리기 쉽지만 여러 개를 묶으면 부러뜨리기 어렵거든.”라는 말 한마디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도망치고 싶던 굴레가 아닌, 서로를 지탱해 주는 유일하고 단단한 울타리로 다시 정의하게 만든다. 결국 그의 질주는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흩어졌던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씩 묶어 다시 단단한 나무로 세우는 거룩한 화해의 질주인 셈이다.

ⓒThe Straight Story

<8km의 속도가 증명한 진심>

앨빈의 여정에는 거센 폭풍우가 쏟아지고 기계가 고장 나 길 한복판에 멈춰 서기도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10 년의 침묵을 깨고 형에게 닿으려는 그의 느린 발걸음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의지의 본질을 일깨운다. 그리고 이 긴 여정의 끝, 마침내 위스콘신에 도착해 형 라일의 집 앞에 섰을 때 영화는 무거운 대사 대신 침묵과 시선을 택한다. 낡은 잔디 깎기 기계를 타고 온 동생을 보며 형은 그저 "저걸 타고 여기까지 온 거냐"고 묻고, 앨빈은 눈물을 참으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을 보고, 별들이 그 하늘을 가득 채운다. 수많은 수식어와 구구절절한 사과보다 이 짧은 대화는 비와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길을 온 앨빈의 모든 진심을 증명하고, 그 말의 질주는 헛되지 않았음을, 그들이 진정한 화해를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The Straight Story

<영화와 인생을 달려나간 말>

영화의 주인공 앨빈을 맡은 ‘리처드 판스워스’는 이 영화의 메시지 그 자체를 온몸으로 증명한 인물이다. 사실 그는 30 년 넘게 할리우드에서 이름 없는 배우로 활동하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늦깎이 배우였다. 그리고 오래된 질주 끝에, 예순이 다 된 나이가 되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주연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의 삶은, 시속 8km 로 묵묵히 인생을 횡단한 앨빈의 직선적인 여정과 닮아 있다.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매일매일 인생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리처드 판스워스는 영화를 촬영할 당시 실제 전립선암 판정을 받아 극심한 통증과 싸우고 있었고, 거동조차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실화였던 앨빈의 여정을 완수하기 노력했고, 이 작품은 그의 찬란한 유작이자 최후의 연기가 되었다.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가 남긴 정직한 질주는 2026 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의지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빨리 도약하라고 다그칠지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앨빈처럼, 그리고 리처드 판스워스처럼 가장 느린 속도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자신의 꿈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정직한 발걸음이 쌓여 만들어진 흔적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빛나는 훈장이 될 것이다.

ⓒThe Straight Story

“세 번째 말(末)<하나 그리고 둘>: 하나가 떠나고 시작되는 또 다른 하나”
<하나 그리고 둘 YiYi> · 2000 · 로맨스/드라마 · 대만, 일본 · 173분

<소음 너머, 적막한 삶>

세 번째 ‘끝의 말(末)’을 위해 에디터가 고른 영화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이다. 작년 12 월 31 일 재개봉하여 국내 관객들에게 다시 한번 울림을 주고 있기도 한 영화는 시작과 끝의 의미를 대만 영화 특유의 서정적이고 세기말적인 감성으로 채웠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 해를 마치며 보아도, 한 해를 시작하며 보아도 그 순간순간마다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처남 아디 (진희성 扮)의 화려한 결혼식으로 활기차게 문을 연다. 하지만, 그 축제의 뒤편에서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가족들에게 예기치 못한 끝의 징후를 선사한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할머니가 들을 수 있으니 매일 이야기를 해달라"고 권하고, 이때부터 가족들은 돌아가며 할머니의 적막한 방을 찾아 자신의 일상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 없는 할머니의 침묵 앞에서 그들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모순적인지를 깨달으며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하게 된다.

ⓒ하나 그리고 둘 YiYi

<다시 시작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

그리고 이 적막한 '끝'의 순간에서 영화의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아빠 NJ (오념진 扮)가 사업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만나게 되는 일본인 사업가 오타(잇에이 오카타 扮)이다. 그리고 오타는 NJ 와 우리에게 그동안의 그 어떤 영화와, 그동안의 어떤 삶의 순간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걸 알려준다. 그는 묻는다. "왜 우리는 처음을 두려워하죠? 매일이 인생에선 처음인데요.” '말(末)'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고,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는데, 그 시작조차 두려워하는 우리를 향한 그의 말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모순도 없다. 그렇게 영화는 당연한 진실 속에서 끝이 단순히 벼랑의 끝이 아니라, 매일 아침 우리가 눈을 뜨는 행위처럼 필연적이고도 새로운 시작임을 일깨워준다. 마치 할머니의 의식 없는 상태는 한 생애의 '말'에 닿아있지만, 그녀를 찾아오는 가족들이 만나는 설렘과 좌절, 쏟아내는 고백은 오타의 말처럼 매일이 처음인 각자의 삶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는 법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 그리고 둘 YiYi

<엇갈리고 만나는 삶의 궤적들>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삶에서 시작과 끝을 맞이한다. NJ 는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 셰리 (가소운 扮)와 도쿄에서 함께하며 지나간 과거의 끝을 매듭짓고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하지만 결국 "인생에 두번째 기회가 생겨도 결국 자신의 선택은 똑같을 것"임을 깨닫게 되며 현재의 삶으로 담담히 돌아온다. 엄마 민민(금연령 扮) 역시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매일 똑같다는 사실에 산사로 떠나게 되고, 사춘기 딸 팅팅(켈리 리 扮)은 이웃집 친구와 얽힌 서툰 사랑의 마침표를 찍으며 비로소 성장한다.

영화는 할머니의 생명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끝의 시간과 대비하여, 처남 아디의 아내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장면을 교차한다. 한 생명이 지상에서의 말을 고하고 떠나갈 때, 또 다른 생명은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며 새로운 하나의 존재를 알린다는 것이다. 이는 말(末)이라는 단어가 가진 '끝단'이라는 의미가 사실은 다음 마디로 이어지는 접점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모든 소란 속에서 막내아들 양양 (조나단 창 扮)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하나였던 나는 둘로, 둘이었던 우리는 다시 하나로>

"아빠, 우리는 삶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잖아요."라고 말하며 자신이 찍은 사진을 건네는 소년의 이 맑은 선언. 이 선언은 어른들이 거짓과 침묵으로 덮어온 세상을 정화한다. 그리고 영화의 끝, 마침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치러지는 장례식장에서 아이는 할머니의 영전 앞에 서서 준비해온 편지를 읽고, 다시 한번 진실을 드러낸다. ”할머니, 전 모르는 게 많아요. 제가 커서 뭘 하고 싶은 줄 아세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양양의 마지막 독백은 상실이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삶의 나머지 절반을 이해하기 위한 통과 의례임을 보여준다. 하나(一)가 끝나야 비로소 다음의 하나(一)가 나타나 둘(二)이 되듯, 영화는 상실 뒤에 찾아오는 기적 같은 깨달음을 담담하게 포착해낸다.

2월의 순간에서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가 실은 더 큰 ‘둘’을 위한 선물이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으면 좋겟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세상은 늘 반쪽뿐이지만, 그래서 그 나머지 반쪽을 채워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2026 년, 당신의 ‘영화로운 말’을 위하여"


지금까지 언어와 동물, 그리고 끝이라는 세 가지 말을 상징하는 영화들을 살펴보았다. 찰리와 니콜의 치열한 대화에서 사랑의 의미를, 앨빈의 느린 질주에서 의지의 뜨거움을, 그리고 양양의 시선에서 마무리의 숭고함을 엿보았다. 이 세 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고 성장하며, 어른들이 놓친 감각을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천천히 보고, 오래 기다리고, 쉽게 단정하지 말라는 그 조용한 가르침은 올 한 해를, 어쩌면 앞으로의 날들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필름 속에 우리가 어떤 대사를 적어 내려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한 해는 명작이 되기도, 혹은 빛바랜 기록이 되기도 한다. 에디터 또한 그동안 잊은 세계를 영화들과 함께 채워보고 또 앞으로의 세계를 맞이하고자 한다. 여러분의 ‘말말말’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이자, 스스로에게는 멈추지 않는 용기가 되어, 그리고 언제나 찬란한 다음 시작을 품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진심으로 응원한다. 붉은 말처럼, 뜨겁지만 다정하게 당신의 영화로운 2026년을 보낼 수 있기를.



Editor / 배서진(@seoj_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