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봄은 마냥 화사하지 않다” 영화《멜랑콜리아》

이토록 파격적인 감독이 도달한 우울의 경지

<꽃을 품은 계절, 멜랑콜리아를 마주하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우울감을 대처하는 방식은 누구나 조금씩 다를 것이다. 우울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한 영화를 찾아보며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비관의 끝자락을 마주하는 영화를 선택함으로써, 멜랑콜리한 정서를 따라가며 자신의 감정을 정화해 나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지독한 염세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우울의 깊은 경지를 온몸으로 겪음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정화하는, 역설적이고도 독특한 방식을 취하게 된다. 나 역시 후자의 방식으로 우울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 영화를, 《멜랑콜리아》를, 사랑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재난영화의 형식적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어떤 작품도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을 탐색해 낸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황홀한 비극 서사, 《멜랑콜리아》.

아마도 이 영화만큼 우울과 불안을 직관적이며 탁월하게 구현해 낸 사례는 드물 것이다. 어느덧 봄이 완연한 4월이다. 화사한 꽃들이 만개한 이 계절, 그 풋풋함과는 대조적인 내면의 격정과 우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아이러니한 경험을 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악동 라스 폰 트리에>

전 세계 영화계에서 꾸준히 파문을 일으키는 감독을 꼽으라면, 누구든 이견 없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을 뽑을 것이다. 1991년 《유로파》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그는, 2000년 《어둠 속의 댄서》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세계 영화계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후 《킹덤》(1994),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 《백치들》(1998), 그리고 《도그빌》(2003)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폰 트리에 감독은 특유의 냉소적 시선과 도발적인 연출로 극단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그는 인륜적인 문제들을 지나치게 도외시하며, 오직 탐미성에만 치중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도그빌》을 포함한 많은 영화에서 여성에 대한 지나친 폭력의 묘사가 문제가 됐었고, 《안티크라이스트》(2009)에서는 성기 절단 장면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또, 《님포매니악》(2013)은 섹스 중독을 소재로 하였지만, 영화 내 섹스 장면의 연출이 주제를 감안하더라도 심리적 수위를 훨씬 넘어선 표현으로 많은 반발을 낳기도 했다.

또 《살인마 잭의 집》(2018)에선 칸 영화제에서 작품이 상영되던 중 지나친 폭력묘사를 견디지 못한 관객 100여 명이 퇴장하는 사건이 있었다. 영화는 여성과 아이에 대한 폭력묘사가 도를 지나쳤다는 이유에서였다. 더 정확히는 어린이를 살해하는 장면에 그치지 않고, 주인공이 자신이 죽인 아이의 시신을 우스꽝스럽게 박제해 전시하는 능욕적 시체 훼손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들은 언제나 탁월한 완성도로 시네필과 평단을 동시에 매료시켜 왔다. 이는, 한 차례 그를 추방했던 칸 영화제에서의 수상경력만 돌아봐도 실히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은 그동안 14번이나 후보에 올랐고 그는 그중에 6개의 트로피를 가져갔으니 말이다.


<심연보다 아득한 우울의 극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평생 우울증에 시달려왔다. 특히 《멜랑콜리아》(2011)를 제작하기 직전, 그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되었다. 극심한 우울증이 지속되던 어느 날, 정신과 담당 의사가 폰 트리에 감독에게 건넨 말 한마디가 이 영화의 모태가 되었다. 그건 바로 "우울증 환자는 일반적으로 재앙이 닥칠 때, 보통 사람들보다 평정심을 잘 유지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었다.

불안과 우울은 대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현재 사이의 괴리가 만들어 낸다. 의사의 말은 바로 그 본질을 짚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에 대한 기대를 상실했기 때문에, 위협으로 가득한 재난 상황에서도 역설적인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짧고 강력한 말 한마디는, 우울로 점철되어 있는 시대의 걸작, 《멜랑콜리아》의 내러티브를 견인해 나가는 정서적 토대가 되었다.


<지구 멸망을 자기 파괴적 멜랑콜리로 번안해 내다>

이 영화의 중심 서사는,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을 지닌 거대한 운석이 지구와의 충돌을 앞두고 있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운석 충돌’이라는 설정은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전형적인 재난 영화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멜랑콜리아》는 재난이라는 외형적 사건을 품고 있음에도, 세상의 혼란이나 공포, 혹은 구조적 해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는 재난영화라면 으레 등장할 법한 장치들조차 철저히 배제된다.

세상의 멸망이 임박했음에도 각국 정상들이 모여 위기를 논의한다거나, 시민들이 방공호로 대피한다거나, 뉴스 속 앵커가 연일 특보를 전하는 장면, 혹은 도시가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혼돈의 이미지들은 이 영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폰 트리에 감독의 관심은 오로지 개인, 그리고 개인이 느끼는 감정에 있다. 즉 《멜랑콜리아》는, 전통적 재난영화의 틀을 빌려왔지만, 본질적으로는 지구 멸망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우울이 관통하는 자기 파괴적 충동으로 번안해 낸 독특한 영상 언어인 것이다.


<우울과 불안의 예술적 정의>

영화는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실린 선율과 함께, 약 8분간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정지된 회화에 영화적 시간성을 부여함으로써, 마치 살아 숨 쉬는 그림처럼 영상을 구성했고, 우울이라는 감정을 몽환적인 이미지로 시각화해 냈다. 이 시퀀스는 영화의 본격적인 내러티브와는 별개로, 작품 전체의 내용을 다양한 회화적 이미지와 결합해 미학적으로 압축해 낸 장면이다.

쉽게 말해, 이 장면들은 영화의 ‘요약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관객은 이 오프닝 시퀀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에 다소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까지 마주한 뒤 다시 이 시퀀스로 돌아온다면, 그 의미와 감정의 무게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영화 초반, 관객을 단숨에 몰입시켜 버리는 꽤 독창적이고도 인상적인 인트로다.

Melancholia Intro (Kirsten Dunst) - Tristan & Isolda by Richard Wagner / ⓒYouTube

* 위 영상이 앞서 말한, 오프닝 시퀀스 중 일부에 해당된다.


<저스틴과 클래어>

영화의 전체적인 구성은 두 개의 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저스틴의 이야기를 다루는 제1막과,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로 돌진해 오는 사실을 인지한 뒤 극도의 불안에 잠식되는 언니 클래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제2막이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 영화는 제1막의 대부분을 주인공 저스틴의 결혼식 파티 장면으로 채운다. 이 파티 시퀀스는 무려 30분이 넘는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극 중 중요한 심리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 장면의 구성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1972)를 떠올리게 한다. 폰 트리에 감독은 《대부》의 구성을 차용해, 겉으로는 축복과 화려함으로 꾸며진 결혼식이라는 무대를 통해, 그 이면에 자리한 긴장과 불안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대부》에서 결혼식 장면은 가족의 결속과 범죄의 세계를 교차시키며 ‘패밀리 비즈니스’라는 이중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각인시킨다. 《멜랑콜리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혼식이라는 형식적이고도 격식을 갖춘 사회적 의례와, 그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저스틴의 극심한 우울증은 끊임없이 충돌하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대부》에서 결혼식과 범죄가 하나의 풍경처럼 묘사되듯, 《멜랑콜리아》에서도 호사스러운 결혼식과 절망적인 우울은 하나처럼 병치된다.


<넌 꼭 행복해야 돼>

주인공 저스틴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광고 카피라이터로 등장한다. 저스틴의 광고회사 사장은 결혼식 축사에서 그녀가 뛰어난 카피라이터라고 극찬한 뒤 즉석에서 아트디렉터로 승진시켜 주는 생색을 낼 정도로 뛰어난 인재이다. 하지만 그녀는 우울하다. 심지어 가장 행복해야 할 본인의 결혼식에서조차 결코 행복하지 못한다. 반면, 언니 클래어는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저스틴을 다독이며 그녀가 보편타당성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하도록 이끈다.

이는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으로의 변모를 의미한다. 저스틴의 결혼식 장소인 18홀 골프장을 끼고 있는 대저택은 중세 귀족 계급사회의 흔적을 지닌 상징적 공간이다. 이 대저택을 제공한 클래어의 남편이자, 저스틴의 형부 마이클은 “엄청난 비용을 들였으니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저스틴의 신랑 잭은 저스틴을 붙잡기 위해 우아한 과수원 사진을 보여주며 평생의 사랑을 약속하고, 심지어 하객으로 참석한 저스틴의 광고회사 사장은 축사 중 그녀에게 광고 문구를 적어달라며, 업무 성과를 재촉하는 자본주의적 탐욕을 드러낸다. 이처럼 자본으로 측정되는 형식적인 행복의 척도는 저스틴의 정체성을 억압하고 파괴할 뿐이며, 우울이라는 정신적 침체 상태를 가속화하는데 일조할 뿐이다.

저스틴의 우울은 결혼식 도중에도 곳곳에서 기이한 형태로 드러난다. 드레스 차림으로 식장을 빠져나와 노상방뇨를 하거나 욕실에서 드레스를 벗고 혼자 목욕을 하고, 심지어 초면인 광고회사 신입직원과 골프장 벙커에서 섹스를 한다. 식장 안에서는 우울이 잠복되어 있지만, 바깥에서는 억눌렸던 우울이 이상행동을 통해 표출된다. 저스틴의 멜랑콜리아는 그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징적 질서로 인해 더욱 심화된다. 클래어가 강조하는 결혼은, 인간을 보편적 인간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질서에 수용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저스틴은 이 질서를 거부하고, 자본의 척도에 따라 규정된 결혼의 행복을 거부한다.

이로 인해 저스틴은 우울과 불안에 지배당하며, 탈출구를 찾아 방황한다. “잿빛의 엉킨 실타래를 지나는 것 같아, 내 다리를 휘감고 있어, 너무 무거워서 걸음을 뗄 수가 없어”라는 그녀의 독백은, 질서에 순응하는 보편적인 인간으로 변모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고백이다.


<황홀한 주체적 자아의 발현>

영화가 전개될수록 저스틴의 우울이 짙어지고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와중에, 관객이 주목해야 할 인물은 언니 클래어다. 영화의 2막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클래어의 정신은 저스틴보다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는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로 돌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과학에 근거한 절대적인 믿음이 빗나가며, 영화는 종말론적 분위기로 휩싸였기 때문이다. 클래어는 인간의 지성이 도달할 수 없는 규정 불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절망과 불안 속으로 빠져든다. 이 상황에서 저스틴은 클래어와 반대의 태도를 보인다. 저스틴은 분명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미트 로프에서 담뱃재 맛이 날 만큼 속절없는 우울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2막에서는 멜랑콜리아가 충돌을 앞두자, 언니와는 다르게 초연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특히 밤하늘 멜랑콜리아로 인한 빛 아래, 저스틴이 나신으로 숲 속 바위 언덕에 비스듬히 누워 월광욕을 하는 모습은 마치 행성 멜랑콜리아와 교감하는 듯한 장면으로, 이때 저스틴은 그녀를 감싸는 우울과 슬픔을 황홀한 태도로 직면하며 마음의 평안을 비로소 얻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포기와는 다르다. 오히려 냉정하게 자신과 상황을 돌아보는 가장 자유로우며, 동시에 주체적인 자아의 발현에 가깝다.


<세상의 종말마저도 한 개인의 파멸 앞에선>

한편, 클래어는 지구로 돌진하는 멜랑콜리아가 종말적 재난을 초래할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남편 마이클은 천문학자의 말을 인용해 클래어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행성의 움직임이 예상과 다르게 지구로 돌진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마이클과 클래어는 모두 극도의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결국, 자본으로 뒤덮인 클래어의 남편 마이클은 결국 멜랑콜리아로 인한 종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가족 몰래 자살을 택하고, 클래어는 유한성에 의한 극심한 절망에 갇히기 시작한다. 그녀는 가능성 대신 필연성을 따르며, 세상의 가치를 자본으로 환산하는 보편적인 삶에 익숙한 이성과 과학의 한계를 벗어난 불확실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클래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끝까지 체면을 지키려 노력하며 저스틴에게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종말을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저스틴은 죽음조차 보편적인 체면으로 포장하려는 언니의 말에 단호히 거절하며, “화장실에서 죽는 게 낫겠다”라고 냉소적으로 응수한다. 멜랑콜리아의 충돌 직전, 그런 허위를 거부하는 저스틴의 태도는 언니 클래어와 명확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더욱 눈 여겨볼 장면은 이 영화의 마지막 신이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지구 멸망의 순간은 그 어떤 디스토피아 영화조차 따라오지 못할 만큼 장대하고 환상적이다. 우리가 본 것은, 분명 종말의 광경이지만, 이를 목격하는 관객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종의 해방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집어삼키는 최후의 순간, 클래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조카와 함께 ‘마법 동굴’이라는 상징적인 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최후를 담담하게 맞이하는 저스틴의 초연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더 나아가, 저스틴이 우울을 껴안고 극복하는 모습에서 절망 속의 은근한 희망까지도 엿볼 수 있다.


<어쩌면 그리 크지 않은 절망과 희망의 간극>

《멜랑콜리아》는 나약한 감정으로 여겨졌던 우울이라는 감정이 단단한 내면의 힘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리며, 세상의 종말마저도 한 개인의 파멸 앞에선 티끌처럼 작아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삶의 의지를 상실한 채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한 소녀의 모습은, 과연 파멸이었을까, 아니면 구원이었을까.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고, 고작 음식 한 입조차 어려운 병리학적 우울. 생명의 모든 활력이 짓눌린 채 꼼짝없이 멈춰버린 좌절의 상태. 우리는 그런 절망의 끝자락에서 때때로 놀랍도록 새로운 창조의 기운을 얻기도 한다.







Editor / 김성욱(@wookk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