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애하는 악인들에게” <신세기 악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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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유서 깊은 가르침은 선대에겐 매우 죄송하지만, 내가 가장 경멸하는 말이다. 영화 ‘넘버 3(1997)’에 등장하는 마동팔의 표현을 살짝 빌려볼까. “정말 X 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를 저지르는 X 같은 XX들이 나쁜 거지.” 바로 이거다.
게다가 애초에 죄와 사람을 분리하는 게 가능한가? 세기의 벽돌책 삼대장 중 하나인 ‘존재와 무(1943)’의 저자이자, 실존주의의 대가로 통하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라면 아마 ‘NO’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선언이다. 인간은 어떤 정의나 목적, 운명 없이 그저 빈 존재로 세상에 먼저 존재하며, 그 후 이어지는 삶 속에서의 선택과 그에 따른 행위가 각자의 본질을 구성해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죄와 사람을 별개로 보는 건, 적어도 실존주의에서만큼은 절대적 금기다. 죄는 곧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각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하지만 금기는 깨지라고 있는 법. 내 이 굳건한 믿음은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9)’의 '한나(케이트 윈슬렛)'를 만나며 산산이 부서진다. 1958년, 서독. 전쟁으로 폐허가 된 노이슈타드 거리를 가로지르는 트램. 30대의 한나는 이 낡은 이동수단을 관리하는 차장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풍경은 겉보기엔 평범하나 어딘가 경직되어 있고, 그녀의 하루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던 길, 한나는 우연히 쓰러져 있던 10대 소년 마이클을 발견하고 소년을 살뜰히 챙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접점 하나 없던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둘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끈끈히 연결된 어엿한 커플로 거듭난다.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부제처럼 마이클은 거의 매 만남마다 한나에게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읽어주는데, 한나는 그걸론 성에 차지 않는 듯 끈질기게 책에 집착한다. 오죽하면 ‘사랑을 나누기 전에 책을 읽어줄 것’이라는 나름의 규칙도 정했을까.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한나는 급작스레 마을을 떠나 자취를 감춰버린다. 이유조차 모르는 마이클은 홀로 남아 이별의 아픔을 견뎌낸다.
훗날 둘은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는데, 장소가 영 예사롭지 않다. 바로 홀로코스트 전범의 재판 현장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 가벼운 인사조차 나눌 수 없다.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방청객, 한나는 전범 용의자.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게 무색해질 정도로 둘의 거리는 이미 너무나 멀어진 뒤다.


한나는 재판관의 날카로운 심문에 자신은 감시원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라며, 되려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다른 용의자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과 이간질을 반복하는 상황 속에서, 순진할 정도로 맹목적인, 때문에 도덕적 판단조차 유보된 한나의 태도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한나의 태도에 방청객들의 비난은 더욱 거세진다. 결국 재판의 말미, 결정적 증거인 보고서 작성의 책임자를 가려내기 위한 필적 감정에서 그녀는 펜을 쥐길 포기한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전부 자신이 작성했다는 위증을 하며 모두의 죄를 홀로 덮어쓴다. 그제야 마이클은 깨닫는다. 자꾸만 책을 읽어달라 조르던 그녀… 펜을 쥐는 법 조차 모르는 그녀… 그녀는 글을 몰랐던 것이다.


“악이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진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게 ‘악’은 괴물적 본성에서 튀어나오는 기행이 아니다. 오히려 체계적이고 일상적인 시스템 속에서 작동하는 너무나 평범한 개념이다. 일방적인 순응,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게 사유하지도, 그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도, 죄라는 결과 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는 한나.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이 무지는 인간을 단숨에 비도덕적 구조의 톱니바퀴 속으로 몰아넣는다.
<악인에게도 순정은 있다>
헐리우드 최고의 악당 맛집, ‘다크 나이트(2008)’. 그중 인기가 가장 좋은 건 역시 조커다. 일단 비주얼이 압권이지 않은가. 언젠가 조커의 패션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다음은 그때 알게 된 내용이다.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던 '린디(Lindy Hemming)'의 목표는 과거의 조커와의 차별화였다. 그동안 꾸준히 소모되어 온 캐릭터인 데다가 워낙 독보적이였으니 말이다. 가장 유명했던 잭 니콜슨의 조커가 채도 높은 보라와 초록으로 대비를 극대화 했다면, 히스 레저의 조커는 키 컬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빛바랜 색감으로 빈티지한 분위기를 연출해 암울한 무드를 살렸다. 대신 이기 팝과 조니 뎁처럼 특색 있는 아티스트들의 강렬한 애티튜드를 첨가해 선명한 존재감을 가미했다.


그러나 사실 나의 최애는 조커가 아니다. '투 페이스(에런 엑하트)'다. 조커의 패셔너블함과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사연 플러스, 로빈의 치열한 용기와 패기 플러스, 배트맨의 융통성 없는 정의감 플러스, 펭귄맨의 쇼맨쉽까지 전부 갖춘 육각형의 빌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걸맞는 화려한 과거도 있다. 한때 투 페이스는 하비 덴트란 이름의 검사이자, 시민들에겐 화이트 나이트란 애칭으로 불리며 고담의 법과 정의를 대변하던 선인 중의 참선인이었다. 또한 시장 선거에 출마할 정도의 명성과 인기, 아름다운 연인 레이첼까지… 역시 다 가진 육각형의 남자였다. 이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 고담시에서 대체 무슨 희망을 보았는지, 회생불가 막장 도시의 드라마틱한 변혁을 목표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그리고 기어코 일이 터지고야 만다.


누가 뭐래도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어라. 레이첼의 죽음은 하비를 투 페이스로 각성시키는 트리거가 된다. 이에 더해 그녀를 죽인 조커에 대한 증오와, 그녀 대신 자신을 살려버린 배트맨에 대한 분노까지. 이 모든 부정적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하비는 하루아침에 고담을 몰락시킬 위력의 악당으로 변모한다. 하비는 조커처럼 동료를 떼로 몰고 다니는 대신 동전 던지기로 사람들을 조롱한다. 악인의 끝판왕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 의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둘의 동전 장난엔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안톤의 동전은 운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원작자인 코맥 매카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세계엔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침묵한 채 방관하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 안톤은 그 틈새를 노린다. 상대의 목숨을 담보로 동전을 튕김으로써 신의 부재를 체감하게 하고 신의 대리인을 자처한다. 하지만 이는 결정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다. 이에 반해 투 페이스의 동전은 전생(?)인 하비의 신념이자, 윤리적 자아의 옵션인 공정함의 표상이다. 비록 내 모든 것을 잃었어도 이것만은 지키겠다는 그의 강인한 신념이 투영된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짠하다.
결과 역시 뻔하다. 한낱 동전의 앞뒷면이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대신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남은 건 손바닥 위에 의미 없이 떨궈진 오십 대 오십이란 확률 뿐이다. 결국 이 동전은 무늬만 공정한 심판을 표방하는 합리화의 도구이자, 강요된 윤리다. 하물며 애당초 한쪽이 이미 불에 그을린 상태이기에, 위대한 물리 법칙상 반반 확률도 기대할 수 없다. 어찌 되었던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지켜낸 하비, 아니 투 페이스는 이로서 만족할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한나와 투 페이스. 그들에게 죄는 일종의 사고다. 다시 말해, 의도치 않게 죄에 휘말려버린 셈이다. 무지로 인한 수치심 속에서 생존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한나는 본인의 바람과 달리 대역죄인이 되었다. 또한 온몸을 불살러 정의를 수호하려던 투 페이스의 노력은 절망으로 얼룩진 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영화 ‘곡성(2016)‘에 비하면 이건 약과다. 그곳에서의 악은 사고처럼 발생하지도, 내부에서 솟아나지도, 외부로부터 침투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미 사방은 초토화다. 마치 정황증거만 가득한 미해결 사건처럼 찝찝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와타시와 아쿠마다. 한 때 예능을 점령했던 이 유명한 대사는 사실 없는 대사다. 그러나 우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인 상태다. 전형적인 만델라 효과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관람객 역시도 당연히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악마라 단정하는 듯 보인다. 물론 영화 극후반부에 약간의 힌트를 던져주지만, 그게 외지인의 진짜 모습이라 단정할 수 있을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어리숙한 카톨릭 부제인 '양이삼(김도윤)'의 몰아치는 불안이 무시무시한 환상을 만들어 낸 것 일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 소동의 중심에 선 외지인은 그저 타지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배척당하며, 목숨이 위협받을 정도의 갖은 수모를 겪는다. 참 안됐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린 영화 속에 깔린 짙은 의심 속에 서서히 동화된다. 그건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효진(김환희)'의 아버지인 '종구(곽도원)'의 이성은 그리고 종구를 돕는 모든 사람들의 이성도, 근처에 도사린 실체 없는 악 앞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외지인. 이제 그는 악마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악마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의 간절한 믿음이, 그 집요한 의심으로부터 비롯된 확신이, 한 순간에 무의미해져 버릴 테니 말이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영화의 끝에서 진실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누군지 내 입으로 아무리 말해봤자” 당신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이 영화를 끝까지 관람한 이유는 “그가 악마라는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니까.” 그리고 그 순간, 진짜 악마가 탄생한다.
Editor / 주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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