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소고 (小考) : EP.1 사랑의 운명론과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실존주의 소고(小考)

'실존주의 소고'란 20세기 전반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인 실존주의에 대한 단편적인 고찰이 담긴 에세이 콘텐츠.


[1] 사랑의 운명론과 무라카미 하루키


0.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아쉽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이고, 지나간 것을 놓아줄 힘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어찌 되었든 계속해서 잃어가는 삶이기에.

어디에선가 다들 잘 살고 있구나.

말이 마음에 깊게 박히는 때가 있다. 과거보다 사람간의 관계를 이어가기 훨씬 쉬워진 시대이지만 정작 내가 손에 꼭 쥐고 있는 관계의 끈은 내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나의 끈을 꼭 쥐고 있는 사람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겠지 하는 아쉬움과 서운함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 하는 슬픔이다. 내가 놓아주었던 많은 인연들도 모두 어디에선가 잘 지내고 있겠지.

포르투갈어 ‘Saudade’는 깊이 사랑했지만 돌아킬 수 없이 망가져 버렸거나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찬란한 슬픔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름다웠던 것만을 그리워하지 않기에 우리에게 슬픔과 불안은 유일한 숙명인지도 모른다. 나를 지나쳐간 것들은 행복이었고,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것도 행복이며, 또 보내주어야 할 것도 행복일 것이다.



1.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는 영화 <타짜>의 김혜수가 호구에게 팬티를 보여주듯, 우리의 필연인 Saudade를 넌지시 보여준다. 첫 만남에 서로가 완벽한 짝이라는 것을 알아본 소년과 소녀는, 이렇게 간단히 운명의 상대를 만나도 되는것인가? 하는  사소한 의심 때문에 자신들의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서로간의 재회를 다시 한 번 운명에 맡겨둔 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극적인 연출을 좋아하는 어떤 절대자가 개입 하기라도 한 듯, 우연히 두 사람 모두 기억을 잃는 질병을 앓게 되었고, 14년이 흐른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마주친 두 사람은 잃어버린 기억의 희미한 빛을 막연하게나마 느낀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두 사람의 기억의 빛은 너무나도 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과거처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스쳐 지나 사라지고 만다.



2.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뒷길을 홀로 걷다가, 운명의 상대를 스쳐 지나가 버린 소년이, 자신의 운명의 상대에게 건네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말로 끝을 맺는다. 우리가 낯선 이를 운명적인 상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왜 서로에게 혹은 그 자극적인 관계에 취해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일까? 상실의 슬픔에서 낭만적이 운명까지, 그것은 잘 안잠기는 지퍼처럼 강한 연관성으로 묶여있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고대인들은 현상에는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자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현상의 원인자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수단은 늘 절대자를 상정하는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많은 종교와 미신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고대인들만의 특징은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서도 사랑이라는 놀라운 현상은 인간이 회의적 태도로 운명의 문제를 생각할 능력을 잃게한다. 물론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 만큼은 너무나도 강력한 운명이라는 관념도, 실존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인간의 필연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로 설명할 수 있다.



2-1.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운명은 다르게 말하면 주어진 정답같은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의 원인을 모를 때 운명은 정답처럼 주어진다. 즉, 불안은 무엇인가가 깨끗하게 정돈되어지지 않아 답이 주어지지 않을 때 발생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에 따르면, 인간이 그들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거대한 ‘시간’에 공포와 불안을 느낄 때, 그들은 역법체계를 만들어냈다. 어떤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지 모를 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특정한 단위로 반복시켜 그 막연함이 주는 공포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기 위해서다. 달력을 만든 후 우리는 반복되는 년,월,일,시,분,초에 살고있다. 우리는 광활한 시간의 우주 속에 내가 어디 있는지 스스로 기준삼을 수 있게 되었다. 달력의 발명 이후 시간의 광대함이 주는 불안감은 사라졌다. 이 달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운명을 믿게되는 과정과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대한 감정은 그 원인이 정확하게 규명될 수 없기에 우리에게 불안감을 준다. 그리고 그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흩어져있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들에 논리적 서사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년이 자신이 100퍼센트의 여자라고 느끼는 소녀와 자신의 관계에 서사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 처럼.



3. 한편 그렇다면 소년은 정말 소녀에게 운명을 느낀 것일까? 운명이 사랑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해답이라면, 소년이 설명하고 싶었던 것은 정말 자신이 그 특정한 소녀에게서 느낀 감정일까?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낭만적 운명론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하게 될 운명’으로 착각한다는 데에 있다. 이 말은 운명을 바라는 우리는 사실 대상이 아닌 그 상태를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하게 될 누군가가 나에게 운명인 것이 아닌, 운명적 사랑에 빠진 나의 상태가 나에게 운명이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왜?



3-1. 왜 우리는 운명적 사랑에 빠진 상태를 갈구하는 것일까?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아무 근거도 없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계에 던져져 버렸기 때문에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괴로움 속에서 생을 이어나가다 허무하게 죽을 뿐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러한 무규정성이 바로 인간존재가 가지고있는 불안감의 원천이다. 즉 인간은 자신에게 결여된 생의 이유를 늘 찾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우리 인간존재는 신의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며 인간은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것을 목표로 하는 이성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를 거치며 우리는 우리를 설명할수 있는 보편본질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스스로의 본질성을 획득하기 위해 가장 쉽게 빠지는 것이 직업이나 관계 그리고 상태라고 말한다. 즉 소년이 운명을 느낀 대상을 만났다는 것은 사실 그 소년은 소녀라는 대상보다는 운명을 느끼고 있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취해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매력적인 이유이다. 사랑의 근거를 상대방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상대방과의 관계속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즉, 이 이야기는 실존주의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본질의 상실이 유발하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소년이 그 욕구를 상대방과의 관계성 속에서 설명하려는 과정을 낭만적 운명론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4. 한편 이 글은 낭만적 운명론의 무용성을 주장하기 위한것은 아니다. 운명론이라는 것이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두루마리에 쓰여진 텍스트이던, 우리를 잡아당기는 운명의 실에 의한 것이건, 세상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를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던 그 실체가 불명확함은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4월의 어느 아침 한 거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어가던 소년은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던 소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우리는 보통 실존성을 회복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우리는 불안을 이겨낼 방법을 끝없이 찾기를 바라고, 그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이후에는 그것이 얼마만큼 본질적인 것인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불안을 이겨내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면, 그것이 설사 일시적인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랑이나 술이나 취하지 않는다면 지금껏 많은 이들에게 찾아졌겠냐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5. 우리는 결국 불안을 이기기 위해 역할을 찾아 헤매이며, 상실의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영원한 운명을 갈망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잃어가는 삶에 처해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 운명이라는 미신을 지어내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되어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