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소고 (小考) : EP.2 셰리 르빈(Sherrie Levine)의 카메라와 실존주의적 확장

실존주의

실존주의 소고(小考)

'실존주의 소고'란 20세기 전반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인 실존주의에 대한 단편적인 고찰이 담긴 에세이 콘텐츠.


[1] 셰리 르빈(Sherrie Levine)의 카메라와 실존주의적 확장.


0. 우리는 타인과의 교류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갈망한다. 교실의 가장 뒷자리에 앉아 내 뒷덜미에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나의 뒤통수에 잠재적으로 시선을 던질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위안 받고 싶어 한다. 홀로 서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동시에 외롭기 때문에.

Sherrie Levine / ⓒFlash Art



0-2. 까마득한 학부생 시절, 선배들은 자신의 과제에 출연할 배우를 구하기 위해 적절한 이미지의 후배들을 물색하며 과방을 전전하곤 했다. 카메라 앞에 서 볼 경험이 전혀 없었던 스무 살의 나는 선배들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고, 어차피 하는 거 즐기자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이후 과제를 제출한 선배는 교수님께 ‘저놈은 앞으로 과제에 쓰지 말라’는 질타를 받았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내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멋쩍게 웃었지만, 한동안은 해당 수업을 듣던 선배들이 으레 과제에 출연해 준 후배들을 놀리며 건네던 ‘연기 잘 봤다’는 짓궂은 농담을 견디지 못해 선배들을 피해 다녔다. 나를 배우로 쓴 선배는 캠퍼스 근처 포차에서 술을 사주며 내 처참한 연기력에 대한 분석(을 빙자한 조롱)을 안주 삼아 밤을 새웠다. 사실 나도 의아했다. 왜 카메라가 나를 향하면, 나는 텅 비어버리는 것인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타인과 관계 맺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색하면서도 낯익은 감각은 카메라라고 불리는 기록용 도구의 존재론적 가능성을 미래의 나에게 열어두는 추상적인 예언이었다.



1. 1980년대 초 많은 여성 작가들은 전통적으로 창조성이 재능에 기반했을 뿐 아니라 특권에도 기반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작업을 많이 해왔는데 그 작가 중 많은 수(가령 ‘셰리 르빈(Sherrie Levine)’, ‘신디 셔먼(Cindy Sherman)’, ‘메리 캘리(Mary Kelly)’) 가 자신의 매체로 사진을 선택했다. 스타니스제프스키(Staniszewski)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근대 서구 회화에의 주요한 전통인 누드화에서 진정한 주역은 그림 앞에 서 있는 남성 감상자다 ~ 여성은 ~ 스스로의 욕망을 노출하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남녀 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에 대한 관계도 결정한다. 여성의 의식에 자리 잡은 내부 관찰자는 남성이며, 여성의 응시 대상으로서 스펙터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자아를 관찰자, 피 관찰자 두 가지로 분류시켜 항상 보여지는 자기 자신을 동시에 주시하며 그 이미지에 영향을 받게 된다.”



1-2.한편 실존주의적 시선을 비롯한 모든 관계 맺는 방식 속에서 대자존재가 즉자존재로 즉자화된다는 사실은 보편적 인간의 속성 중 하나이다. 이를 여성만의 경험으로 제한하는 것, 그리고 그 원인을 예술작품에서 그 대상이 드러나는 방식에서 찾는 것은 현상에 대한 지엽적 분석에 불과하다. 즉, 자아를 관찰자와 피관찰자로 나누고, 보여지는 자기 자신을 주시하며, 그 이미지에 영향받는 것은 보편적 인간의 경향성이다. 이 주장은 예술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현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로, 그리고 그 현상의 결과로 인해 해당 현상이 더욱 심화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남성 예술가가 다수를 차지하던 역사적, 사회 구조적인 배경 아래에서, 예술작품의 영역에서는 여성을 물화시키는 작업물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이 사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활용될 때 이 현상에 관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실수가 자주 벌어지며, 이 판단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상에 관한 가치판단에는 특정한 목적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가뭄이라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농경 사회가 전제되어야 하듯이). 즉, 위 현상이 지적하는 ‘대상화’는 인간의 실존적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에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약 이 시대의 예술 작품들이 여성을 물화시키는 경향성이 강했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이는 대상을 즉자화 시키는 대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포함하는데, 이는 현존재적인 모든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시사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

Sherrie Levine / ⓒMoMA



2. 우리는 우리가 의식을 통해 구성한 세계의 중심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나의 세계에 타자가 출연하기 전까지는. 타자는 나와 같이 스스로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출현은 세계 간의 충돌을 의미한다. 타자가 나의 세계에 출현해 나에게 시선을 던질 때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론적 지위가 사물과 같은 상태로 추락함을 느낀다. 듣기에는 복잡하지만, 집에서 혼자 혼잣말을 하거나 춤을 추다가 사실은 방에 조용히 있던 혈육에게 그 모습을 들키는 상상을 한다면 존재론적 지위의 추락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혼자 TV를 볼 때는 소리 내어 웃지 않다가 누군가와 함께 TV를 볼 때는 소리 내어 웃는다거나, 혼자서는 편하게 찍던 셀카도 타인 앞에서는 조심스러워지는 상황 등이 타자의 존재론적 지위를 보여주는 예시라 하겠다. 즉 타자의 등장은 주체인 우리가 스스로를 대상화시켜 객체로 환기하게 하는 존재론적 현상인 것이다.



2-2. 스타니스제프스키(Staniszewski)는 역사 속에서 많은 예술 작품이 여성과 남성 중 여성을 물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실은 분명하며, 이는 80년대 초 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매체로 사진을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2장 [영혼과 육체]에서 대도시에의 삶에 결코 참여할 일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여자 테레자가 바람기 많은 연인 토마시에 의해 둘 사이의 관계에서 스스로의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지위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후 테레자는 프라하의 봄 당시 사진작가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 내용은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주장과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 스타니스제프스키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매체로 사진을 선택한 이유가 사진이 회화에서 남성들이 차지하는 절대적 영역에 대한 대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3. 우리가 노래를 크게 부르며 샤워를 할 때 문 밖에서 누군가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난다면, 우리는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노래를 멈추게 된다. 이 상황은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될 가능성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쉽게 즉자화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것이 바로 카메라가 가지는 존재론적 가능성의 근거이다. 카메라는 실존주의적 측면에서 시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두 대자는 스스로 대상화되는 경험을 하는 반면,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인간은 늘 대자의 지위를 유지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사물임에도, 대자의 상을 물질화하고 복제해서 많은 사람의 시선하에 내보일 수 있다는 잠재력 덕분에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대자의 위치를 점유할 수 있다. 카메라에 노출된 대자는 욕실 문밖에 누군가 돌아다니고 있을 가능성을 마주했을 때처럼 자신의 모습이 타자의 시선 하에 놓일 가능성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카메라를 손에 쥔 인물과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인물 간의 존재론적 서열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두 대자간의 힘의 저울에 카메라의 가능성의 추가로 얹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카메라를 눈에 붙이고 렌즈를 통해 타인을 바라보는 대자는 카메라의 형상 뒤에 얼굴을 가린 채로 상대방을 마주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스타니스제프스키의 분석처럼 많은 예술작품에서 물화 되던 여성들에게 사진이라는 매체는 여러(특히 그녀에 따르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대자의 위치를 손쉽게 점유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3-2. 즉 카메라는 다수의 시선과 비슷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다. 그것은 피사체가 되는 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이 복제되어 다수의 시선하에 놓이는 상황을 가정하게 한다. 이 가능성은 피사체인 인물이, 피사체 자신은 모르는, 타자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자신의 상을 스스로 대상화하여 자신이 자신을 즉자화하는 자기충족적인 현상을 유도한다. 카메라는 가능성만을 제시했으나 대자존재인 인간 스스로 자신의 즉자적 존재 근거를 형성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프로세스를 통해 카메라는 사물이면서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론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4. 그렇다면 반대로 카메라 앞에 서고 싶은 욕망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즉자화되는 경험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채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연약함 속에 생을 이어가다가 허무하게 죽는다. 이 존재 근거의 부재는 인간 불안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존재의 근거를 가진 사물들처럼 즉자화 된 상태에서 우리는 묘한 배덕감과 함께 안도감을 느낀다. 존재론적 퇴락은 존재근거의 제공까지 보증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인간은 신의 자식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존재론적 불안함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카메라 앞에 서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그가 교회에 가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현기증을 추락에 대한 욕망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조차 현기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실존하고 있는 우리는 늘 존재론적인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익숙한 표현의 근거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존재론적 퇴락을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