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이’와 ‘고레에다’의 영화 속 아이들

<아이들을 빚어내는 두 손길>

건조해진 눈과 자리 잡아버린 입. 목적 없는 손과 자동 반사적 반응들. 변하고 싶었던 적도 없었고 변해 버리지도 않은 것 같았지만, 이제 우리는 ‘어른’이라 불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던 어른이라는 것들은 어쩌면 조금씩 흐려지고 느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의 시작점에서 조금은 앞서 서 있는 것들이 있으니, 바로 ‘아이들’이다. 마구 뛰어다니다 넘어져서 울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 웃는 아이들. 달리고, 또 달리며 조금씩 변해 가는 시선들. 우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직도 꾸고 있다는 불편함과 부러움, 동시에 늘 마음속에서 그리워했던 순수함과 사랑을 주는 아이들. 그들이 뛰어오고 우리가 걸어왔던 그 길에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비추는 영화 속에서도 아이들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며, 다른 존재들과는 분명 다른 숨을 쉰다. 아이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되어, 우리가 잊었고 기억해야 할 것들, 그리고 또 바라봐야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 아이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어른과 다르게 온전히 담아내야 어색하지 않으며, 그들의 시선에서만 펼쳐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이끌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는 다시 아이가 될 수 없기에, 그 세상을 그려내는 일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두 영화감독은 그것을 완벽히 해냈다. 그들이 바로 ‘소마이 신지’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이다. 이 두 이름을 떠올리면 함께 들려오는 아이들의 뛰노는 발걸음과 웃음소리, 그리고 선명히 보이는 두 감독의 색채. 지금부터 그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을 만나본다.


<소마이와 고레에다>

ⓒZoom Japan

그들의 영화와 아이들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두 감독의 삶을 먼저 살펴보자. 1948년에 태어난 ‘소마이 신지’는 대학을 중퇴한 후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로망 포르노로 영화 인생을 시작했으며, 일본의 마지막 도제식 영화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후 여러 회사를 오가며 1980년,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꿈꾸는 열다섯>으로 장편 데뷔를 하게 된다. 그는 첫 작품부터 그만의 독특한 연출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곧이어 <세일러복과 기관총>으로 다시 한번 인정을 받았다. 이어 영화 <태풍 클럽>으로 제1회 도쿄 국제영화제에서 도쿄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성인 영화와 예술적 색채를 강하게 띤 작품들을 다양하게 선보였다. 1990년대에는 <이사>, <여름 정원> 등 아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를 발표하며 시대와 관념에 따라 변해 가는 자신만의 색채를 드러냈다. 그리고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2001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IMDB

소마이 신지의 활동기가 끝나갈 즈음, 떠오른 감독이 있었다.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다. 1962년 태어난 그는 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TV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방송계에 입문했다. 다큐멘터리 연출가 시절부터 사회적 약자를 다룬 작품을 제작했고,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계에도 진출했다. 그는 1995년 첫 장편 영화 <환상의 빛>으로 베니스 영화제 촬영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이후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등을 발표하며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2018년에는 <어느 가족>으로 제71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며, 최근에는 한국 배우들과 협업한 <브로커>와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괴물> 등을 선보이며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처럼 각자의 삶을 살아온 소마이 신지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공교롭게도 현재 한국에서 함께 주목받고 있다. 소마이 신지는 한동안 국내에서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사>, <태풍 클럽>, <여름 정원>이 최근 연이어 재개봉하면서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가족>, <괴물> 등으로 이미 한국 영화 팬들에게 익숙하다. 그렇다면 왜 이 두 감독은 지금 이토록 사랑받고 이야기되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그들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분명한 요소, 바로 ‘아이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이며, 작지만 동시에 큰 존재인 아이들. 지금부터 두 거장의 영화 속 아이들을 통해 그들의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소마이의 아이들: 비와 죽음>

ⓒIMDB

소마이 신지는 변해가는 시간에 따라 각 작품마다 다른 변주를 보여 주었지만, 그의 영화들은 종종 ‘소마이 스타일’이라는 말로 정의되곤 한다. 멀리서 관찰하듯 이어지는 롱테이크와 롱샷, 그 안에서 드러나는 날것의 질감과 외면하는 듯한 무심함. 그러나 그 무심함에 맞서듯 끊임없이 분열되고 파괴되며 멈추지 않는 에너지의 세계. 어쩌면 이는 소마이 신지가 활동하던 당시, 무너져 가는 일본 영화계와 꺼져 가는 버블경제, 그리고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가 만들어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는 점차 하강하고 분열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을 온전히 견디는 아이들이 있기에, 소마이의 세계는 단순한 추락이 아니라 들썩이며 다시 떠오른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 속 아이들은 ‘비와 죽음’으로 이해된다. 내리고 고이고, 튀고 뭉치는 비. 떨어지는 빗방울은 아이들에게 함께 떨어질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동시에, 다시 상승하고 떠오를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리고 이 하강과 상승은 생명, 특히 죽음과 맞닿아 있다.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아이들을 죽음과 연결한다는 것은 혁신적이면서도 용감한 소마이 신지의 결단이라 할 수 있다.


  1. 태풍 클럽 (1985)
ⓒIMDB

비와 죽음의 상징은 먼저 영화 <태풍클럽>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원래도 금이 가 있던 세계에 비가 내리고, 그 빗물이 틈을 파고들며 더 큰 균열을 만든다. 결국 비는 태풍이 되어 거대한 혼란으로 번진다. 사춘기의 혼란을 겪는 아이들은 폐쇄된 공간에 갇히고, 억눌린 감정과 욕망이 드러난다. 성적 정체성의 혼란부터 삶과 죽음에 관한 혼란까지, 멈출 줄 모르는 빗줄기 속에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은 점점 젖어 간다. ‘종(種)’이라는 집단적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주인공 미카미는 자살을 통해 ‘개(個)’로서의 승리이자 해방을 택한다. 리에는 자신의 공간을 떠나 도쿄로 향하며 익숙한 가치관으로부터의 탈피를 보여 준다. 켄은 학대와 열등감 속에서 흔들리지만, 마지막에는 빗속에서 알몸으로 춤추며 친구들과 완전한 해방의 순간을 맞는다.

[태풍 클럽] 메인 예고편 / ⓒyoutube

태풍이라는 모든 것이 붕괴되는 원초적 환경은 아이들의 불안과 고통을 드러내는 동시에, 억눌린 감정을 폭발시킨다. 아이가 어른으로 넘어가는 찰나의 시기, 그 시기에 내재된 강렬한 혼란이 해방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그 방식이 설령 죽음일지라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소마이 신지의 시선. 그리고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는 ‘맨살의 춤을 통한 회귀’는 이전의 영화 속 아이들을 표현하는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2. 이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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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이혼을 마주하게 되는 렌의 이야기를 담은 <이사>. 어느 날, 렌은 친구에게 이혼한 아버지의 집에 갔다가 새엄마가 출산을 위해 병원에 가는 바람에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그 순간, 렌에게 갑작스레 비가 내린다. 불시에 쏟아진 비처럼 찾아온 새로운 생명은 아이러니하게도 렌의 행복했던 순간을 앗아가며 혼란을, 더 나아가 세계의 종말이자 죽음이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렌은 비가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물속에서, 제사와도 같은 미츠리 축제 속에서 가족과 함께했던 행복한 과거의 자신을 본다. 환상과 꿈처럼 보이는 행복의 마지막은 죽음 속에 있다는 그 명확한 연결관계가 보여주듯, 소마이 신지는 가족의 해체를 통한 외로움의 성장통을 죽음처럼 그려낸다. 그러나 좌절과 넘어짐 속에서 끝내 달리고, 스스로를 축하한다고 말하는 렌처럼, 성장통이라는 고통에는 그래도 ‘성장’이라는 가능성의 이름이 붙는 것처럼, 가족의 이사로 죽어버릴 것 같았던 소녀도 비를 통해 다시 끈질기게 성장하고 살아나갈 것이다.


3. 여름 정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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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노인의 죽음을 마주하겠다는 일념으로 노인을 따라다닌다는 설정부터가 그러하듯, 영화 <여름정원>에서도 비와 죽음의 메타포는 아이들에게 노골적으로 사용된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죽음을 보기 위해 왔다는 엉뚱한 목적이 무색하게도 아이들은 노인과 세대를 뛰어넘은 유대를 갖게 된다. 그렇게 유대감 쌓이자 비가 오는 날, 노인은 숨겨왔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게 된다. 따뜻하고 몽글거린 영화의 분위기에 반전을 주던 노인의 고백. 그것은 생각보다 잔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아이들은 노인에 대해 작게나마 남아있던 의문과 거리감은 사라지게 된다. 미루고 숨겨왔던 것들에 대한 고백으로 깊게 박힌 돌을 빼낼 수 있게 된 노인은 아이들을 통해 구원받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현실에 대한 조금은 빠른 직시를 통해 과거 세대를 온전히 바라보고 새로운 세대를 준비할 수 있게 된다. 언제나 죽음을 품은 노인의 집과 폐허 속에서,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목격한 아이들. 죽음을 상징했던 노인을 통해 아이들은 살았고, 새로운 생명과 세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여름정원] 메인 예고편 / ⓒyoutube

소마이 신지는 아이들에게 닥쳐온 비와 죽음을 통해 기존 질서의 파기와 재탄생, 그리고 그 사이에서 움트는 생명의 순환을 온전히 담아냈다. 비가 내리면 마구 뛰어다니는 아이들처럼, 하락의 이미지로 쓰이던 비와 죽음은 오히려 혼란과 상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명력으로 변모한다. 소멸과 종말의 상징이던 죽음 또한 또 다른 탄생의 의미를 품게 된다. 결국 소마이 신지의 영화 속 비와 죽음은 아이들 개개인의 성장, 나아가 세계라는 더 큰 서사를 꿰뚫는다. 그렇게 개인적 변화, 집단적 해방, 세대 교체를 거치며 비와 죽음은 아이들을 변화시킨다.


<고레에다의 아이들: 어른과 거짓말>

ⓒIMDB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조용한 카메라와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다큐멘터리 연출로 출발한 그는 어쩌면 소마이 스타일과 유사하게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주변을 바라보게 한다. 식탁 위에 놓인 그릇, 복도 끝의 빛, 아이들의 손과 발. 말보다 사물과 몸짓이 먼저 말을 건네는 그 세계에서 아이들은 종종 어른들이 만든 문장 밖에서 호흡한다.

버블 붕괴 이후 장기 침체와 가족 형태의 변화, 돌봄의 구멍이 점점 일본 사회 속 아물고 있는 상처가 소마이 신지의 방법이라면, 고레에다가 택한 방식은 관찰과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의 핵심에는 항상 어른과 거짓말이 있다. 소마이 신지와 마찬가지지만 고레에다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곁에 있다가 슬며시 무너지고 또 자국 내며 떠난다. 그리고 그 어른들로 만들어진 거짓말,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를 위해 하는 거짓말은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들은 누군가를 지키거나 버티기 위해, 혹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작은 이야기들이 되거나 사랑과 자기기만이 섞인 서툰 장치들이 된다. 또 그 장치가 아이들의 눈앞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무너지는지가 고레에다의 낮은 시선으로 드러난다.


  1. 아무도 모른다 (2004)
영화 <아무도 모른다> 스틸컷

어른과 거짓말의 프레임으로 보면, <아무도 모른다>의 가장 근본적인 거짓은 ‘부재’다. 엄마의 부재는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아이들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익명의 거짓이다. 그러나 고레에다는 그 거짓의 장막 앞에서 아이들을 피해자의 표본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낮은 시선으로 그들만의 세계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기록한다. 수도와 전기가 끊긴 방에서 컵라면 용기에 식물을 키우는 장면처럼, 아이들은 부재라는 가장 큰 거짓 속에서 자신들만의 가족과 질서라는 단단한 진실을 만들어 낸다.

고레에다는 폭력의 절정을 과장하기보다 여름의 열기, 닳아 해진 발뒤꿈치, 전기가 끊긴 정적 같은 미세한 감각으로 낙관적 거짓과 현재의 진실이 맞닿는 온도를 보여 준다. 장남 아키라는 나이에 맞지 않는, 어쩌면 거짓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른의 행동을 체화하고 흉내 낸다. 음식을 하고, 동생을 재우고, 물건을 훔치며 버티는 것처럼 아이는 거짓이 남긴 빈자리를 또 다른 거짓으로 채우고, 그 진실을 홀로 아파한다. 결국 영화가 끝내 묻는 것은 “누가 거짓말을 했는가”가 아니다. 그 거짓이 무엇을 지탱했으며, 무엇을 무너뜨렸는가. 그리고 그 둘을 동시에 견디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비추는 것, 그리고 우리가 돌아보게 하는 것. 그것이 고레에다의 목적이다.


2. 어느 가족 (2018)

영화 <어느 가족> 스틸컷

영화 <어느 가족>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과 인물들이 체험하는 내적 진실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각자의 이유로 모인 이들은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짜 가족’이지만, 서로를 보듬고, 일상의 손길로 실질적 유대를 쌓아 간다. 좀도둑을 뜻하는 원제 ‘Shoplifters’는 그들이 도둑이 아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행위가 거창한 범죄가 아니라 사소한 생존술에 가깝다는 뉘앙스를 남긴다. 후반부, 어른들의 거짓을 폭로하는 과정으로서 쇼타가 도둑질에서 이탈하는 선택은 영화의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행복이 끝내 법과 제도라는 구조적 프레임 앞에서 좌초하게 되면서, 고레에다는 거짓과 진실을 통해 ‘가족’에 대한 현실 인식을 한층 더 심화한다. 이 영화에서 거짓말은 특이하게 기만이 아니라 돌봄을 작동시키는 언어로 기능하며, 가족은 서류가 아니라 행동의 합의로 묶인다. “비밀인데, 우린 가족이야”라는 쇼타를 향한 오사무의 대사가 근거 없고, 말뿐인 거짓이지만 아이에게는 돌봄의 언약이 되고, 반대로 수사실의 차가운 빛 아래서 국가가 요구하는 진실은 아이들을 조각과 상처로 분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남는 것은 아이들의 시간이다. 다시 찾아간 오사무를 결국 다시 떠나는 쇼타의 발걸음, 베란다에서 다시 바람을 맞던 유리의 작은 어깨. 그것들은 작고 외로워 보이지만 분명 전과는 다른 온도를 가질 것이다.


3. 괴물 (2023)

영화 <괴물> 스틸컷

또 다른 아이들이 등장하는 영화 <괴물>. 이 영화의 핵심은 아이들이 바라보는 진실의 상대성이다. 어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말을 정당화한다. 사오리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호리 선생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교장은 학교 평판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반면 아이들의 시점은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깝다. 그들의 괴물놀이는 어른들이 부여한 괴물의 정의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며, 미나토와 요리가 현실로부터 도피해 만든 버려진 기차는 어른들의 거짓과 편견이 닿지 않는 유일한 유토피아이다. 이 공간은 아이들이 사회적 통념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한 투쟁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인정받는 유일한 장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빗속을 뛰어가는 아이들은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거짓으로부터 해방된 그들 스스로를 축복하는 희망의 몸짓으로 해석된다. 고레에다는 어른들의 서사가 아이들을 어떻게 오독하는가를 <괴물>로 더욱 정교하게 확장한다. 고레에다가 반복적으로 택하는 다시 보기의 구조는, 어른의 언어가 진실을 독점하지 못함을, 그리고 아이들의 시간이 따로 진실되게 흐를 수 있음을 증명한다.

"괴물이거든요" [괴물] 메인 예고편 / ⓒyoutube

결국 고레에다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짓말이 만든 균열에서 관계의 새로운 정의를 찾아낸다. 혈연과 서류, 통념과 확신이 지배하는 질서 바깥에서, 각자의 아이들은 그들은 작은 진실을 만들어낸다. 그 진실은 웅장하지 않다. 그러나 살아 있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거짓말은 어쩌면 파괴나 끝이 아니라, 서툰 사랑이 건네는 다리이다. 아이들은 그 다리를 건너며 어른들이 잃어버린 감각을 상대에게로 조용히 기울어가는 마음을 다시 세계로 가져온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 보이지 않는 재난 속에서 아이들은 거짓으로 길을 잃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스스로의 진실을 발견하며 성장해 나간다. 그들의 성장은 세상의 무너지는 풍경 속에서 힘겹게 움트는 생명력이 아닌, 어른들의 시선으로는 다시 닿을 수 없는 온전한 관계 속에서 기적처럼 피어나는 깨달음이다.


<어른의 아버지>

“The Child is the Father of the Man.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한 시에서 나온 구절로, 아이는 미래의 어른을 담고, 더 나아가 세상 그 자체까지를 담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커져버린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고 해맑기만 해보여 가르치고 보살펴 주어야만 할 대상 같지만, 사실 아이들은 그 이상이다.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 막힘 없이 자유로우며, 깨어 있다. 아이들은 탁하지 않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울고, 망가진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아이들은 각자의 세상을 만들고 또 ‘성장’을 하게 된다. 그들이 원래 갖고 있던 생각들과 자라면서 조금씩 변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미 닫혀버린 어른과 구분되는 아이들만의 고유한 것이며, 우리는 아이들을 통해 잊었던 세상을 다시 또 온전히 이해한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스틸컷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세상을 떠난 소마이 신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일하게 넘어서고 싶었던 감독.” 그 말은 승부의 언어라기보다 고백에 가깝다. 소마이가 열어 놓은 아이의 시간에 맞춰 숨을 고르고,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를 서두르지 않고 듣는 자리를 언젠가는 만들고 싶다는 뜻인 것이다.

소마이의 카메라가 비와 죽음 사이에서 아이를 끝까지 바라보게 만들었다면,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어른의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아이가 스스로 길을 고르는 찰나를 기다린다. 소마이는 붕괴의 한가운데서 아이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면 고레에다는 관계의 균열에서 아이가 다시 말하게 했다. 소마이의 롱테이크가 아이의 호흡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고레에다의 여백은 그 호흡이 관계의 문장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둘은 함께 말한다. 아이가 먼저고, 어른은 그 뒤에서 배운다는 것. 아이들은 우리가 보살펴야 할 대상이기 전에, 우리가 배우고 보아야 할 세계다.

영화 <세일러복과 기관총> 스틸컷

소마이와 고레에다의 세상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놓친 감각을 되돌려 준다. 천천히 보고, 오래 기다리고, 쉽게 단정하지 않으라는 배움. 그 배움을 품은 어른만이 다음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아이의 시간에 맞춰 서겠다는 약속. 우리가 잊은 세계를, 아이들과 함께 다시 배우겠다는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이 이어지는 한, 아이들과 우리는 여전히 자란다.






Editor / 배서진(@seoj_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