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든 뭐든, 먹고 살자고 하는건데
영화추천

우리의 팍팍한 일상을 관통하는 가장 흔하고도 지독한 진리가 하나 있다. 결국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것. 치열한 하루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찌개 냄새에 무장해제 되듯, 우리의 삶은 언제나 밥 한 끼의 온기에 빚을 지며 굴러간다. 놀랍게도 이 세속적인 진리는 2시간 남짓한 스크린 속 환상의 세계에서도 어김없이 유효하다. 우주를 구하는 영웅도, 세기의 로맨스를 나누는 연인도, 피 튀기는 복수를 다짐하는 악당도 결국엔 허기를 느끼고 무언가를 씹어 삼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불완전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훌륭한 영화 속에서의 식사는 결코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나 소모적인 배경으로 그치지 않는다. 감독이 치밀하게 설계한 프레임 안에서, 누군가가 입에 넣는 음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가 된다. 그것은 때론 좁은 골목길에서 피어오르는 처연하고 은밀한 욕망이 되고, 꽉 짜인 규율을 벗어던진 이가 맛보는 달콤한 해방감이 되며, 세상의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을 진짜 가족으로 묶어주는 뜨거운 연대가 되기도 한다. 혹은 가장 일상적이고 쿨한 패스트푸드가 숨 막히는 폭력의 도구로 둔갑하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스크린 위로 음식을 베어 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삼켜내지 못한 감정들이 식탁 위에 흩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인물들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진짜 굶주림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육체의 허기일 수도, 사랑과 자유를 향한 영혼의 허기일 수도 있다. 지금부터 일상의 허기뿐만 아니라 마음의 결핍까지 채워줄, 혹은 서늘한 서스펜스로 우리의 미각을 곤두세울 영화 속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총을 쏘든, 눈물을 흘리든, 춤을 추든, 결국 이 모든 무수한 이야기들 역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스크린 너머, 우리의 마음을 허기지게 만드는 영화 속 음식들”
“첫 번째 식탁: <화양연화>, 닿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는 뜨거운 국수 한 그릇”

좁고 습한 홍콩의 밤거리, 비좁은 계단 위로 빗방울이 무겁게 떨어져 내린다. 화려하고도 처연한 색감의 치파오를 입은 수리첸의 완벽한 자태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그녀의 가녀린 손에 들려 있는 투박한 보온통이다. 남편의 부재 속에서 홀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는 매일 밤 골목 어귀의 노점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아내의 빈자리를 견디며 똑같이 국수로 배를 채우는 남자, 차우와 무언의 시선을 교차하며 스쳐 지나간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국수'는 단순한 길거리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방치된 두 남녀의 지독한 고독이며,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될 위태로운 감정을 삼켜내는 매개체다. 혼자 밥을 차려 먹는 일의 처량함을 피하기 위해, 혹은 그저 누군가와 스쳐 지나가는 짧은 온기라도 느끼기 위해 그들은 좁은 계단을 오르내린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수의 뜨거운 김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아슬아슬하고 은밀한 욕망을 조용히 감싸 안는다.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 관계라는 참담한 진실을 공유하면서도,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며 감정을 억누른다. 하지만 젓가락을 부딪치며 함께 국수를 나눠 먹는 좁은 방 안의 공기에는 이미 숨길 수 없는 사랑이 짙게 배어 있다.

후루룩거리며 뜨거운 면발을 삼키는 행위는, 차마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당신을 원한다"는 고백을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는 쓸쓸한 의식과도 같다. 그들은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가장 일상적인 식사를 나누면서도, 결코 서로의 삶을 완전히 탐할 수는 없다는 슬픈 한계를 확인한다. 그래서 <화양연화>의 국수는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이면서도, 동시에 눈물겨운 식사다.
두 번째 식탁: <매트릭스>, 비루한 현실을 배신한 가짜 스테이크의 달콤한 육즙

화려한 샹들리에가 은은하게 빛나는 최고급 레스토랑, 매끄러운 나이프가 두툼한 고기 사이를 파고들자 붉은 핏물이 먹음직스럽게 흘러내린다.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에서, 인류의 구원자를 기꺼이 팔아넘기기로 결심한 배신자 사이퍼는 스미스 요원과 마주 앉아 아주 여유롭게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는다. 그는 포크에 찍힌 고기 조각을 경이롭다는 듯 바라보며 읊조린다. "난 이 고기가 가짜라는 걸 알아. 내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뇌에 이게 정말 맛있는 고기라는 신호를 보내줄 뿐이지." 그는 이 완벽한 미각의 향연이 실은 0과 1로 이루어진 차가운 컴퓨터 코드에 불과하다는 끔찍한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네부카드네자르 호’의 축축하고 어두운 선실에서, 매일 구토가 쏠리는 콧물 같은 단백질 죽을 꾸역꾸역 삼키며 기계들과 피 말리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진짜 현실은 너무나도 고단하고 참혹했다. 가혹한 진실의 무게는 앙상한 육신을 짓누르고,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대의명분은 매일 밤 찾아오는 텅 빈 위장의 쓰라림을 결코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그 쓰디쓴 진짜 현실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가짜일지언정 매일 입안에서 살살 녹는 이 스테이크의 풍미를 기꺼이 선택하기로 타협한다. "모르는 게 약이지” 고기를 씹으며 황홀하게 눈을 감는 사이퍼의 표정에는, 진실을 감당할 마지막 용기마저 무참히 꺾어버린 밥벌이의 지독한 피로감이 짙게 배어 있다.

세상을 구원하는 위대한 영웅담의 이면에서, 한 인간이 오랜 동료를 팔아넘기고 인류의 미래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이 소름 끼치는 배신조차 결국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의 가장 극단적이고 비루한 형태임을 영화는 서늘하게 까발린다. 우리는 과연 입안에 감도는 저 달콤한 거짓의 육즙을 혐오하며 그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마주하는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 앞에서, 알량한 신념이나 쓰디쓴 진실보다는 당장 내 식탁 위에 오를 기름진 스테이크 한 덩이를 위해 매일 크고 작은 타협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짜라도 좋으니 일단 배부르고 따뜻하고 싶다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나약한 생존 본능을 찌르는 잔인한 식탁이다.
세 번째 식탁: <어느 가족>, 시린 밑바닥의 생을 데우는 눅눅한 고로케

세상의 중심에서 속절없이 튕겨 나가, 그 어떤 따뜻한 시선이나 제도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식탁'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벽한 타인들이 도둑질과 거짓말로 연명하며 만들어가는, 기묘하고도 지독하게 슬픈 가족의 형태를 가만히 비춘다. 화려한 도심의 불빛이 결코 닿지 않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낡고 허름한 단층집. 세상의 서늘한 냉대에 꽁꽁 얼어붙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비좁고 초라한 밥상 위에는, 방금 동네 가게에서 훔쳐 온 혹은 동전 몇 닢으로 힘겹게 구해온 고로케가 기름 밴 종이봉투에 담겨 덩그러니 놓여 있다.

화려하고 근사한 만찬과는 거리가 먼, 싸구려 종이봉투 안에서 이미 고로케의 튀김옷은 볼품없이 눅눅해져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천장이 델 듯 여전히 뜨거운 그 고로케를 호호 불며 목구멍으로 넘길 때, 이 퀴퀴하고 냉기 가득한 방 안에도 거짓말처럼 다정한 온기가 피어오른다. 그들은 고로케의 기름진 맛을 조용히 음미하며 서로의 주린 허기를 살피고, 가장 맛있는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기꺼이 상대의 입에 양보하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혈연이라는 번듯한 사회적 증명서 하나 없는 가짜 가족이면, 또 도둑질이라는 파렴치한 범죄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밑바닥 인생이면 어떤가. 당장 오늘 하루의 끔찍한 추위와 뼈를 깎는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서로의 입에 따뜻한 음식을 밀어 넣어주고, 나란히 어깨를 맞댄 채 컵라면 국물을 들이켜는 그 눅눅하고도 뜨거운 연대감. 그곳에 묵묵히 존재하는 것은 세상의 알량한 도덕적 잣대나 차가운 법의 테두리로는 결코 재단할 수 없는, 그저 살고자 하는 처절한 짐승의 본능과 서로를 향한 슬프도록 깊고 맹목적인 애정이다.
가난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그 볼품없는 고로케는, 길거리에 버려진 유리 파편 같은 인간들을 하나로 단단하게 묶어준 세상에서 가장 처연하고도 눈물겨운 성찬식이다. 도둑질로 얻어낸 떳떳하지 못한 한 끼일지라도, 기필코 서로를 먹여 살리겠다는 그 끈질긴 마음 하나가 그들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족으로 만들었다. 결국 산다는 것은, 그리고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이 매서운 세상의 추위 속에서 기꺼이 내 몫의 따뜻한 고로케 반쪽을 떼어주는 일일 테니까.
네 번째 식탁: <펄프 픽션>,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씹어 삼키는 두 번의 쿨한 햄버거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속 서늘한 폭력과 숨 막히는 긴장의 한가운데에는, 두 번의 햄버거씬이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메트로놈처럼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오가는 피비린내 나는 상황 속에서 패스트푸드의 육즙을 음미하는 그 기막힌 건방짐. 이 영화 속 햄버거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명을 경시하는 건조한 폭력과 허무주의가 가장 힙하고 쿨하게 폭발하는 영화사적 도구다.
첫 번째 햄버거는 타인의 목숨을 거두는 무자비한 사신(死神)의 입으로 들어간다. 보스의 돈을 빼돌린 풋내기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허름한 아파트를 찾아간 갱스터 쥴스. 그는 총구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덜덜 떠는 청년들 앞을 여유롭게 서성이며, 그들이 아침으로 사 둔 햄버거를 빤히 바라보고는 묻는다. "이게 그 하와이안 체인점 거 맞지? 나도 한 입 먹어봐도 되나?" 극도의 공포 속에서, 쥴스는 남의 '빅 카후나 버거'를 빼앗아 육즙이 흐르도록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쩝쩝거리며 패티의 맛을 진지하게 평가하고 시원한 스프라이트로 목을 축이는 그의 태도는, 곧이어 벌어질 끔찍한 살육마저 그저 아침 식사 전 치러야 하는 귀찮은 '업무'로 전락시켜 버린다.

두 번째 햄버거는 정반대로, 언제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위태로운 외줄 타기의 한가운데서 등장한다. 보스의 아내인 미아 왈러스를 에스코트해야 하는 또 다른 갱스터 빈센트. 보스의 여자를 잘못 건드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간다는 무시무시한 소문 속에서, 그는 극도로 뻣뻣하게 긴장한 채 그녀와 복고풍 레스토랑 '잭 래빗 슬림스'에 마주 앉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한 성적 긴장감과 불길한 예감이 감도는 식탁 위에서, 미아는 '더워드 커비 버거'를 양손에 쥐고 탐욕스럽게 베어 물며 5달러짜리 밀크셰이크를 들이켠다. 곧이어 약물 과다 복용으로 거품을 물고 쓰러질 그녀의 끔찍한 비극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두 사람은 햄버거의 맛에 대해 시시껄렁하고도 진지한 수다를 떤다.

타란티노는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가장 싸구려 일상인 햄버거를, 타인을 죽이거나 혹은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가장 극단적인 죽음의 순간 한가운데 툭 던져 놓는다. 누군가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판국에도, 또 보스의 여자와 목숨을 건 데이트를 하는 살얼음판 위에서도 햄버거의 고소한 육즙은 여전히 끝내주게 맛있고 콜라는 짜릿하게 시원하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식욕과 무자비한 죽음의 그림자가 기묘하게 뒤엉키는 이 두 번의 식사는, 아무리 끔찍한 비극 앞에서도 우리의 위장은 뻔뻔하게 고프다는 서늘한 본능을 까발린다. 무겁고 끈적한 죽음의 무게마저 한 입 거리의 정크푸드처럼 가볍게 씹어 삼켜버리는 이 기괴한 식탁들. 결국 사람을 죽이는 갱스터의 총질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보스 아내와의 데이트도 모두 밥벌이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씁쓸하고도 건조한 농담을, 영화는 두 번의 햄버거를 먹으며 우리에게 툭 던져놓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결국, 우리의 삶도 한 편의 눈부신 식사라면
지금까지 고독과 해방, 시린 밑바닥의 온기와 서늘한 폭력이라는 다양한 감정의 궤적을 지나온 스크린 속 식탁들을 살펴보았다. 수리첸과 차우의 애틋하고 처연한 국수에서 시작해, 쥴스의 건조하고 무자비한 햄버거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다른 세계, 다른 서사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결국 그들 역시 무언가를 씹고 삼켜내야만 다가오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어쩌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이 시시껄렁하고 세속적인 농담 속에는, 우리가 삶을 지탱해 나가는 가장 숭고한 진실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깊게 베어도, 거대한 책임감에 짓눌려도, 심지어 죽음이 오가는 참혹한 비극 앞에서도 우리의 육체는 정직하게 허기를 느끼고, 우리는 기어코 다시 숟가락을 든다. 그것은 가끔 지독하게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다시 살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 강력하고도 슬픈 생명력이다.
치열하고 팍팍했던 오늘 하루의 끝, 당신의 식탁 위에는 어떤 의미가 놓여 있는가. 누군가에게 베인 상처를 애써 삼켜내며 들이켜는 맥주 한 캔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와 마주 앉아 온기를 나누는 따뜻한 찌개 한 그릇일 수도 있다. 그 메뉴가 무엇이든, 무너질 것 같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버텨내고 다시 무언가를 씹어 삼키며 내일을 준비하는 당신의 그 일상적인 행위는, 스크린 속 그 어떤 명장면보다 눈부시고 가치 있다.

그러니 오늘 저녁만큼은 스스로를 위해 가장 따뜻하고 맛있는 것을 내어주자. 당신의 그 조용하고도 치열한 식사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따뜻한 위로이자, 멈추지 않는 용기가 되기를 바라며. 영화든 뭐든, 결국 우리 모두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이 찬란하고도 버거운 하루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것이니까.
Editor / 배서진(@seoj_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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