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를 향한 집념의 문화, <쇼쿠닌 정신>
shokunin
일본어에는 단순히 ‘기술자’로 번역하기엔 조금 심오한 단어가 있다. 바로, ‘쇼쿠닌’. 일본의 장인 정신을 뜻하는 이 단어는 단순한 직업인을 넘어, 자기 일에 대한 깊은 긍지를 가지고 최고 수준의 기술을 선보이는 이들에 대한 존경을 담은 언어다. 그들에게 일은 자신의 혼을 담아 완벽함을 향해 나아가는 '도(道)'와도 같다. 평생에 걸쳐 기술을 연마하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구도자적 태도로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으레 일본에 배울 점을 논할 때 장인 정신을 이야기한다. 최고를 향한 집요함, 노력.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 또한 최고 아닌가? 청소년기부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성장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이미 한국 사회에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쇼쿠닌 정신’을 가지지 못했을까. 일본의 쇼쿠닌 정신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J 컬쳐 뒤에는 쇼쿠닌 정신이 있다>
일본의 쇼쿠닌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메이지 시대(1868년 ~ 1912년) 이전 일본 백성은 계급의 이동은 물론 직업 이동도 불가능했다. 선대의 직업이 곧 후대의 직업인 셈이다. 이와 같은 경직된 사회상 안에서 유일한 성공은 선대보다 더 나은 물건을 만드는 것. 혹독한 기술 훈련을 통해 이를 잘 수행한 이들에게는 ‘쇼쿠닌’이라는 찬사가 따랐다.
이러한 배경이 현재의 ‘닛폰이치(日本一)’로 이어져 국내 제일을 목표로 갈고 닦는 제작자를 키워냈다. 물론 이런 가업 승계, 쇼쿠닌 정신 같은 것들은 흔히 장인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도자기, 염색, 금공 등 공예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골목 속 숨어있는 낡은 식당처럼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닿아있는 분야에서도 발휘된다. 이처럼 일상에 스며든 쇼쿠닌 정신, 즉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이 한 끗 다름을, 지금의 J 컬쳐를 만들어낸 셈이다.



<분수를 알아라. ‘쇼쿠닌다마시’>
'쇼쿠닌' 정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완벽을 향한 집념 외에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쇼쿠닌와자'와 '쇼쿠닌다마시'다. 앞서 이야기한 기초 기술, 즉 흉내 낼 수 없는 쇼쿠닌들의 기술을 ‘쇼쿠닌와자’라고 표현한다면, 자기 기술에 자부심을 느끼고 완벽히 하려는 마음가짐은 ‘쇼쿠닌다마시'라 한다. 그런데 이 쇼쿠닌다마시의 핵심에는 다소 의외의 덕목이 자리한다. 바로 '분수를 아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겸손해지라는 의미를 넘어, 자신의 공인된 실력과 서열상의 위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이는 직업 이동이 불가능했던 경직된 사회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선대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1000년의 전통을 이어온 진흙 염색>
앞서 언급했듯 일본 전역에는 여전히 ‘쇼쿠닌 정신’이 지배적이다. 특히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 특히 크래프트맨십과도 맞닿아 패션의 영역에서는 매력적인 브랜딩 포인트로 작용한다. 이 중 ‘네오 앤티크’를 지향하는 브랜드 타이가 타카하시가 그렇다. 오래된 옷, 1000년 전 보살상이나, 고문서 등 시대를 초월한 물건을 수집해 온 디렉터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문화와 시대정신을 연구해 늘 전통 기술을 현대 컬렉션에 융합하여 선보였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타이가 타카하시가 아닌, 이 브랜드가 채택한 염색 기법이다. 바로 일본 아마미 오시마 섬의 진흙 염색. 150만 년 전 퇴적층이 남아있는 지형적 특성을 활용해 진흙에 담그는 과정을 반복하는 염색 방식이다. 이곳 아마미는 ‘오시마 명주’의 발상지이다. 오시마 명주는 130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견직물 중 하나인데, 타이가 타카하시는 이 명주의 염색 기법을 빌린 것이다.
명주를 염색하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다. 우선, 다정큼나무의 줄기와 껍질 등을 조각내어 열수 추출한다. 이 염액에 비단실을 수십 회 염색한 다음 진흙으로 여러 차례의 매염을 한다. 보통 총 50회 정도의 공정으로 염색하고, 많게는 90번 가까이 염색한다.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이 과정은 깊이 있는 검은색과 특유의 광택을 만들어 낸다. 1000년 이상 이어온 전통 방식 고수 그리고 이를 현대 의류에 채택한 그들은 쇼쿠닌 정신을 잇는 훌륭한 사례로 남았다.



<영화로 먹는 라멘 한 그릇>
일본인이 바라보는 장인정신은 이타미 주조 감독의 영화 <탐포포>(1985)에서 ‘라멘’이라는 소재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속 라멘은 완벽을 향한 탐구의 여정,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엿 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이다. 면의 탄력, 국물의 농도, 그릇 온도까지. 모든 요소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 집념은 직인(職人)이 일을 대하는 방식을 그대로 비춘다.



이타미 주조는 이 과정을 유머와 풍자의 형식으로 쌓아 올리며, 라멘 한 그릇에 일본 사회의 미학과 규율, 쇼쿠닌 정신을 압축한다. 특히 극 중 ‘라멘 마스터’가 설명하는 라멘 철학에 대한 장면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특유의 고집스러움까지 묻어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삶과 일, 자기 세계와 외부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엿 볼 수 있다.
<속도와 깊이, 어느 것이 우선일까>
하지만 일본의 장인 정신도 위기를 맞고 있다. 후계자 부족과 고령화로 인해 수십 년간 이어온 공방이 문을 닫고, 정교한 기술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정신을 잇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전통은 끊기게 된다. 그럼에도 일본 사회가 여전히 장인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를 이어가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의 장인 정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정교한 기술’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를 존중하는 사회적 합의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효율을 만들었다면, 일본의 쇼쿠닌 정신은 깊이를 만들었다. 기술의 정밀함보다 본받아야 할 것은 그 정밀함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시선이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쇼쿠닌 정신 뒤에는 기술자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금 더 천천히,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 아닐까.
Editor / 권혁주(@junyakimchin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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