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생각나는 배우, 그리고 사람” <필립 시모어 호프만>

Philip Seymour Hoffman

좋은 배우는 많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자주 발견되는 배우는 많지 않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문득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다.

지난 5월 연희동에 위치한 라이카 시네마에서 열린 폴 토머스 앤더슨 기획전에서 그가 출연한 <마스터>와 <매그놀리아>, <펀치 드렁크 러브>를 연달아 상영했다. 당시 영화가 끝나고 나의 머릿속에는 바로 그 남자,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남았다. 언제나 주인공이었던 배우가 아니었으며, 잘생긴 스타도 아니었고, 스크린을 압도하는 액션 배우도 아니었으며, 매 작품마다 외형을 완전히 바꾸는 변신형 배우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은 늘 영화의 마지막에 생각난다. 그래서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어졌다.

ⓒBrigitte Lacombe

21세기 최고의 배우였던 필립 시모어 호프먼. 감독들은 그를 위해 역할을 썼고, 배우들은 가장 함께 연기하고 싶은 배우로 그의 이름을 꼽았다. 2005년 <카포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이후 <찰리 윌슨의 전쟁>, <다우트>, <마스터>로 세 차례 더 오스카 후보에 올랐다. 그는 분명 동시대 최고의 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하지만 필립 시모어 호프먼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연기력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그는 늘 상처 입은 사람을 연기했다.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 인정받고 싶지만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 성공했지만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누군가를 구원하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

생각해 보면 그의 영화에는 완벽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어쩌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 자신이, 완벽한 인간보다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Brigitte Lacombe

<평범하지만, 특별한 소년>

1967년 미국 뉴욕주 페어포트(Fairport). 그곳에서 태어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처음부터 배우를 꿈꾸던 아이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무대보다 운동장에 있었다. 레슬링을 좋아했고, 승부를 즐겼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연기보다 훨씬 익숙했다.

페어포트 고등학교 졸업 앨범

그의 인생을 처음 바꾼 것은 어머니 메릴린이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아서 밀러의 연극 <All My Sons>를 보러 갔고, 훗날 호프먼은 이 경험을 "내 인생을 바꾼 기적 같은 경험"이라고 회상했다. 무대 위에는 영웅도, 특별한 인물도 없었다. 죄책감과 후회, 사랑과 상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날 그는 연극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열네 살 무렵 목 부상으로 레슬링을 그만두게 된 그는, 좋아하던 소녀를 따라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무대는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고, 그 감정을 이해하려는 과정은 어린 호프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Marilyn O’Connor

이후 그는 뉴욕대학교 예술대학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연기를 공부한다. 동기들은 그를 화려한 학생이 아니라,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학생으로 기억한다. 누군가 긴장하면 손을 어디에 두는지, 거짓말을 할 때 시선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슬픔을 숨길 때 호흡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보다 사람을 관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런 태도는 훗날 그의 연기 철학으로 이어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부정적인 캐릭터를 찾은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갈등과 싸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끌렸다. 그런 인물들이 내게 흥미롭다."고 말한 바 있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에게 연기는 선하거나 악한 사람을 연기하는 일이 아니라,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STEVEN KLEIN

졸업 후에도 그는 곧바로 할리우드로 향하지 않았다. 뉴욕 연극계에 남아 무대에서 활동했고, 실험극단의 핵심 배우로, 이후에는 공동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배우와 연출을 오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보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호흡하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이름 없는 경찰, 친구, 변호사 같은 단역과 조연을 전전했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꾸준히 오디션을 봐야 했다. 스물두 살 무렵에는 약물과 알코올 중독을 겪기도 했다. 이런 시간은 그의 연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재활 치료를 받은 뒤 그는 언제나 연기에 대해 고민하던 배우였다. 연기에 대해 "연기라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잘해내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배우라는 직업을 향한 끝없는 고민을 드러냈다. 그래서인지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외로움과 욕망, 죄책감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는 그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 남겨두었다.

<리노의 도박사> / ⓒimdb

그리고 1996년, 그런 배우를 가장 먼저 알아본 감독이 있었다. 폴 토머스 앤더슨. 두 사람은 앤더슨의 첫 장편 <리노의 도박사>에서 처음 만났다. 호프먼의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앤더슨은 그 안에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1년 뒤, 다시 그를 <부기 나이트>로 불러들인다. 그 두 번째 만남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라는 이름을 영화 팬들에게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


<부기 나이트> : 늘 곁에서, 머물며 지켜주는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폴 토머스 앤더슨 | 1997 / ⓒimdb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반복해서 선택한 인물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부정적인 캐릭터를 찾은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갈등과 싸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끌렸다"고 말했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연기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복잡함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먼저 질문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질문을 가장 먼저 알아본 감독이 폴 토머스 앤더슨이었다. 1997년, 서른 살의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몇몇 영화에 얼굴을 비췄지만, 관객들은 그의 이름보다 배역을 기억했다. <여인의 향기>, <트위스터>, <리노의 도박사> 같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대부분 짧은 역할이었다. 그는 늘 이야기의 가장자리에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배우였다.

하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은 그 가장자리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부기 나이트>는 1970~80년대 미국 포르노 산업의 흥망성쇠를 그린 영화다. 얼핏 보면 포르노 산업을 다룬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가깝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스코티 J 역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촬영장의 스태프. 말수가 적고, 사람들 틈에서는 늘 한 발 뒤에 서 있는 남자. 그리고 주인공 더크 디글러를 짝사랑하는 사람.

ⓒimdb

스코티는 자신의 감정을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더크가 웃으면 함께 웃지만, 눈을 오래 마주치지 못한다. 말을 걸고 싶지만 망설이고, 술을 마셔야만 겨우 진심을 꺼낼 수 있다. 이 모습은 어쩌면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평생 연기하게 될 인물들의 원형이다. 그는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숨기는 사람을 연기했다. 영화에는 지금도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대표 장면으로 꼽히는 시퀀스가 있다. 술에 취한 스코티는 차 안에서 더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더크는 당황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린다. 혼자 남은 스코티는 운전대를 움켜쥔 채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I'm a fucking idiot." 그는 울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그저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관객은 한 사람의 평생을 본다. 거절당한 슬픔보다, 사랑을 말해버린 자신이 더 부끄러운 사람.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감정을 크게 표현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관객을 설득했다. 호프먼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스코티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얼마나 오래 외로웠는지를 영화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짐작하게 된다.

<부기 나이트>는 폴 토머스 앤더슨에게도 중요한 작품이었지만, 필립 시모어 호프먼에게는 배우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두 사람은 이 작품을 계기로 서로의 가장 중요한 창작 파트너가 된다. 이후 앤더슨은 <매그놀리아>, <펀치 드렁크 러브>, <마스터>까지 자신의 핵심 작품마다 호프먼을 다시 불러들였다. 사실 앤더슨의 호프먼에 대한 애정은 <부기 나이트>보다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2015년 인터뷰에서 처음 호프먼을 본 순간을 떠올리며 "그를 <여인의 향기>에서 처음 봤을 때, 첫눈에 반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 영화관에 앉아 '그는 나를 위한 배우이고, 나는 그를 위한 감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그들의 만남은 단순한 캐스팅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앤더슨은 호프먼에게 가장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물들을 맡겼고, 호프먼은 그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은 채 살아 있는 인간으로 완성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세계를 넓혀준 창작 파트너였다. 돌이켜보면 <부기 나이트>의 스코티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이후 호프먼이 평생 연기하게 될 인물들의 원형이 이미 담겨 있다.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 인정받고 싶지만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 자신보다 타인의 행복을 먼저 바라보는 사람.

그렇게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영화에서 인간의 결핍을 자신의 언어로 연기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그만의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해나간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은 그의 결핍. 그리고 그 결핍은 8년 뒤, 한 실존 인물을 만나 가장 깊은 모순으로 이어진다.


<카포티> :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다
<카포티 Capote> 베넷 밀러 | 2005 / ⓒimdb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먼저 떠오르는 작품 중 하나는 <카포티>다. 트루먼 카포티.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해야만 했고, 성공하는 순간 가장 큰 죄책감을 얻게 된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배우 인생 역시 <카포티>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미국배우조합상. 2006년 시상식 시즌의 주요 남우주연상을 사실상 휩쓴 이 작품은 그를 세계 최고의 배우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의 가장 큰 성공이 가장 모순적인 인물을 통해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베넷 밀러 감독의 <카포티>는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다. 영화는 1959년 미국 캔자스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클러터 일가 살인사건에서 출발한다. 이미 『티파니에서 아침을』으로 명성을 얻었던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작은 마을 홀컴을 찾는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좋은 글을 쓰는 것.

ⓒimdb

하지만 사건을 조사하던 그는 사형수 페리 스미스를 만나고, 취재원과 기자의 관계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변해간다. 카포티는 페리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는 폭력적인 범죄자였지만, 동시에 버려진 아이였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흥미롭게도 카포티 역시 비슷했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자랐고, 평생 자신이 속할 곳을 찾지 못했던 사람.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을 천천히 따라간다. 사랑과 성공은 함께할 수 있는가 <카포티>가 특별한 이유는 살인사건보다도 창작자의 윤리를 다루기 때문이다.

카포티는 점점 페리에게 정을 붙인다. 면회를 오가고, 변호사를 알아봐 주며, 그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들어준다. 하지만 그가 쓰고 있는 『냉혈한』은 페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끝낼 수 없는 책이었다. 그는 친구를 살리고 싶었다. 동시에 작가로서는 책을 완성해야 했다. 그리고 그 두 마음은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영화 후반부, 페리의 사형이 집행되는 장면은 그래서인지 더욱 잔인하다. 카포티는 울지 않는다. 환호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바라본다. 그리고 관객은 깨닫는다. 그가 잃은 것은 취재원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 일부였다는 사실을.

트루먼 카포티는 연기하기 어려운 실존 인물이었다. 높고 가는 목소리, 독특한 억양, 과장된 몸짓은 조금만 과해도 흉내처럼 보이기 쉬웠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약 4개월 동안 카포티의 인터뷰와 방송 영상을 반복해 보며 말투와 몸짓을 연구했다. 하지만 그가 집중한 것은 단순한 모사가 아니었다. 그는 "카포티의 말투를 완벽하게 흉내 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생명력과 미묘한 뉘앙스를 표현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화 속 그의 연기는 외형보다 내면에 가깝다. 페리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는 자신감과 불안이 동시에 스치고, 사형 집행 날짜를 듣는 순간에는 침묵만으로 죄책감과 무력감을 드러낸다. 카포티를 닮으려 하기보다, 카포티가 되어가는 과정에 집중한 연기였다 카포티는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얼굴에는 승리의 기쁨이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공허하다. 그렇게 그는 절필했다. 호프먼은 눈물조차 선택하지 않는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무너진 사람을 연기한다. 그 절제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책의 제목인 『냉혈한』 처음에는 당연히 살인범 페리와 딕을 가리키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제목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가장 냉혈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람을 죽인 페리였을까. 아니면 사랑하게 된 사람의 죽음을 기다리며 원고를 완성한 카포티였을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 역시 카포티를 변호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그를 이해하게 만든다. 그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연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을 연기했다. <카포티>는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배우 인생을 완전히 바꾼 작품이었다.

평론가들은 그를 "당대 최고의 미국 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함께 언급되곤 했다. 화려한 변신을 보여주는 배우와,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배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21세기 미국 연기를 대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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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큰 성공은 가장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은 '좋은 조연'이 아니라 필립 시모어 호프먼라는 이름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예상과 달리 더 대중적인 작품이 아니라, 훨씬 어렵고 실험적인 영화를 선택한다. 바로 찰리 카우프먼의 <시네도키, 뉴욕>이다.


<시네도키, 뉴욕> 나라는 예술가의 인생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 찰리 카우프먼 | 2008 / ⓒimdb

이제 그는 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평생과, 시간이 남기는 흔적 자체를 연기해야 했다. 배우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 이후에도 같은 진심으로 연기하는 일이다. 2006년 <카포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더 이상 '훌륭한 조연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 이름 자체가 작품의 신뢰가 되었다. 대부분의 배우라면 흥행작이나 대형 스튜디오 영화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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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카우프먼의 감독 데뷔작 <시네도키, 뉴욕>. 찰리 카우프먼은 이미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이터널 선샤인>으로 "현실과 상상을 뒤섞는 가장 독창적인 각본가"라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첫 연출작 역시 관객에게 친절한 영화는 아니었다. 개봉 당시에는 "난해하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았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영화는 시간이 흐르며 다시 발견됐다. 오늘날 <시네도키, 뉴욕>는 종종 21세기 최고의 미국 영화 가운데 한 편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재평가의 중심에는 언제나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연기가 있었다.

호프먼이 연기한 케이든 코타드는 뉴욕의 연극 연출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일들이 풀리지 않고, 부모와 남편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던 그. 아내와 자식까지 떠나 보내게 되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맥아더 재단의 거액 지원금을 받은 뒤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담은 연극. 이를 위해 그는 거대한 창고 안에 뉴욕 시내를 그대로 재현하고, 배우를 캐스팅한다. 그리고 그 배우를 연기하는 배우를 다시 캐스팅한다. 현실을 완벽하게 복제하려는 시도는 끝없이 확장되고, 무대는 도시가 되고, 도시는 또 다른 무대가 된다. 연극은 점점 거대해지지만, 케이든의 삶은 점점 작아진다. 떠난 아내와의 관계는 더 이상 붙잡을 수 없게 멀어졌고, 딸은 사라져간다.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의 연극 밖에서 늙어간다. 그는 삶을 기록하려 했지만, 정작 삶을 살아갈 시간은 놓쳐버린다. 영화는 묻는다. 예술은 삶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시간'을 연기했다. 많은 배우들은 노화를 분장으로 표현한다. 흰머리를 붙이고, 허리를 굽히고, 목소리를 낮춘다. 하지만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접근은 전혀 달랐다. 그는 시간을 몸에 쌓았다. 영화 초반의 케이든은 빠르게 걷는다. 말도 빠르다. 시선도 살아 있다. 하지만 영화가 흐를수록 변화는 아주 미세하게 찾아온다. 계단을 오를 때 한 번 더 숨을 쉰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대답하기 전 침묵이 길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다 말없이 시선을 거둔다. 그는 늙은 사람을 연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 사람의 몸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연기했다. 그래서 케이든은 특별한 예술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래처럼 보인다.

ⓒimdb

찰리 카우프먼은 <시네도키, 뉴욕>의 출발점이 '죽음'과 '삶의 짧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끝은 시작 속에 이미 들어 있다”는 문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삶은 언젠가 끝나기에 의미를 갖고,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은 그 끝을 향해 조금씩 이어진다.. 흥미롭게도 그 ‘달려가고자하는 욕망’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삶과도 닮아 있다.

그는 완벽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카우프먼가 만들어낸 케이든은 완벽한 예술을 꿈꾸지만, 그 완벽함을 향해 갈수록 자신의 삶을 조금씩 놓쳐버리는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이 모습은 배우로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연기를 하는 것은 쉽지만. 하지만 위대한 배우가 되려는 일은 정말 고통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21세기 최고의 배우로 평가받는 호프먼에게 연기는 결코 익숙해지는 일이 아니었다. 작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이해해야 했고, 그 과정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그래서 케이든은 완벽주의자라기보다, 끝없이 더 진실한 삶을 이해하려는 창작자에 가깝다. 호프먼 역시 평생 그런 배우였다.

젊은 시절에는 조용하다고 느껴졌던 그의 연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얼마나 치밀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눈물이 아닌, 후회를 연기했다. 늙음이 아닌 시간을 연기했다. 그래서 <시네도키, 뉴욕>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어려운 영화인 동시에, 가장 필립 시모어 호프먼다운 영화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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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다시 폴 토머스 앤더슨에게 돌아간다. 오스카 이후 자신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시험했던 배우. 그리고 그 시험을 마친 뒤, 그는 다시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감독을 만난다. 폴 토머스 앤더슨과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또 다시 작품을 만든다.


<마스터> : 추종자와 지배자를 함께
<마스터 The Master> 폴 토머스 앤더슨 | 2012 / ⓒimdb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폴 토머스 앤더슨과 16년 동안 다섯 편의 장편영화를 함께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아들인 ‘쿠퍼 호프먼’이 폴 토머스 앤더슨의 작품에 출연되었을 정도로 그들의 관계는 깊었다. 그리고 마스터는 서로가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한 두 예술가가 만든, 인간에 대한 가장 복잡한 영화였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앤더슨은 중요한 순간마다 호프먼을 찾았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호프먼에게 맡긴 역할이다. 영웅도, 압도적인 승리도 없었다. 늘 스스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남자. 용서받고 싶어 하는 아버지. 누군가를 구원하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흔들리는 지도자. 앤더슨은 호프먼 안에서 스타가 아니라 인간의 균열을 보았다. 그리고 그 균열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 바로 <마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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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술과 폭력 속을 떠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코즈(The Cause)'라는 신흥 사상을 이끄는 랭커스터 도드(필립 시모어 호프먼)를 만나게 된다. 도드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압도적이다.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는 화술, 흔들림 없는 태도, 확신에 찬 눈빛. 누구나 그를 지도자라고 믿는다. 하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은 권력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감독이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도 흔들리는가였다. 도드는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작은 균열이 드러난다. 자신의 이론을 의심하고, 가족에게 기대고, 프레디를 붙잡으려 하지만 끝내 그를 바꾸지 못한다. 아니 그는 바꾸었지만 붙잡지 못한다. 결국 도드 역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한 인간일 뿐이었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이 균열을 아주 작은 변화로 표현한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지만 호흡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단정했던 자세는 조금씩 무너지며, 늘 타인을 바라보던 시선은 어느 순간 자신을 향한다. 그는 무너지는 순간보다,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순간을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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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를 이야기할 때 호아킨 피닉스를 빼놓을 수는 없다. 프레디는 본능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굽은 어깨, 비틀린 걸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 호아킨 피닉스는 몸 전체를 뒤틀며 감정을 밖으로 분출한다. 반대로 호프먼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등은 곧게 펴져 있고, 손짓은 절제되어 있으며, 말투는 끝까지 품위를 유지한다. 한 사람은 감정을 쏟아내고, 다른 한 사람은 감정을 가둔다. 그래서 두 배우는 경쟁하지 않는다. 서로의 연기를 완성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감옥 신이다. 철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프레디는 분노를 폭발시키며 변기를 부순다. 도드는 프레디에게 "나 말고는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그 짧은 순간, 지도자와 신도의 관계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두 인간뿐이다.

ⓒimdb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배우를 '성격파 배우'나 '주연 배우'처럼 구분하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내가 연기하게 될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 간극을 메워야만 그 인물이 나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같은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연기의 출발점은 캐릭터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런 태도는 <마스터>의 랭커스터 도드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도드는 사이비 교주로도, 상처 입은 아버지로도 읽힐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호프먼은 어느 한쪽으로 인물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는 관객에게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긴다. 이 사람이 왜 이런 믿음을 만들었는지, 왜 프레디를 끝내 놓지 못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선과 악 사이의 결론은 끝내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Victoria Will

<모스트 원티드 맨> 희망을 믿는 자가 건네는 마지막 희망
<모스트 원티드 맨 A Most Wanted Man> 안톤 코르빈 | 2014 / ⓒimdb

돌이켜보면 그는 마지막까지 같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었다.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 그것이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라는 배우의 일관된 궤적이었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을 이야기할 때 많은 기사들은 그의 마지막부터 말한다. 2014년 2월 2일.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 마약 중독. 향년 마흔여섯.  짧은 기사 한 줄은 그의 삶을 너무 쉽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을 이해하려면,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함께 봐야 한다. 스물두 살 무렵 그는 약물과 알코올 중독을 겪었다. 재활 치료를 받은 뒤 거의 20년 동안 술과 마약을 끊은 채 살아갔고,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누구보다 성실하게 커리어를 쌓았다. 2013년 재발을 경험했을 때도 그는 스스로 치료 시설을 찾았다. 회복은 끝난 일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중독으로 정의될 수 없다. 오히려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삶에 더 가까웠다.

ⓒimdb

그 시기 촬영한 작품이 바로 안톤 코르빈 감독의 <모스트 원티드 맨>이다. 영화는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독일 함부르크. 정보기관 책임자 귄터 바흐만은 국제 테러 조직을 추적하면서도, 단순한 체포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 협상과 인내를 선택하는 인물이다. 전형적인 첩보 영화의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총보다 대화를 믿고, 즉각적인 정의보다 긴 시간을 선택한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바흐만을 거대한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구겨진 셔츠를 입고, 커피를 연달아 마시고, 담배를 입에 문 채 피곤한 얼굴로 회의를 이어가는 그는 중년의 공무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인물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끝까지 사람을 믿으려는 인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평생 연기했던 인물들과도 닮아 있다.

그는 언제나 인간의 선의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연기했다. 언제나 절제되고 냉소적으로 보이던 바흐만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라는, 어쩌면 낯뜨러워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부끄러운 말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영화의 마지막, 처음이자 유일하게 분노한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구원이 실패하는 순간. 권력과 이해관계의 욕심 앞에서 누군가의 선한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 그제야 그는 무너진다. 어쩌면 <어 모스트 원티드 맨>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평생 연기해 온 인간에 대한 믿음을 마지막으로 되새기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결국, 다시 인간을 말하는 사람>
ⓒBrigitte Lacomb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가장 많이 회자된 것은 그의 사생활보다 연기였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동시대 가장 야심차고, 가장 널리 존경받은 미국 배우"라고 평가했다. 폴 토머스 앤더슨 역시 훗날 필립 시모어 호프먼와 작업했던 경험을 다니엘 데이 루이스, 호아킨 피닉스와 함께한 경험에 비견하며, 그를 동시대 최고의 배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상대 배우의 연기를 더 좋게 만드는 배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배우들의 배우'라고 불렀다. 그는 화면을 독차지하지 않았고 언제나 장면 전체를 완성했다.

ⓒChristopher Wahl

하지만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배우들의 배우인 동시에, 사람들의 배우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화려한 영웅을 연기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을 연기했다.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 성공했지만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시간을 붙잡으려다 삶을 놓쳐버리는 사람, 누군가를 이끌지만 끝내 자기 자신도 흔들리는 사람. 그의 인물들은 언제나 결핍을 안고 있었고, 그 결핍은 이상할 만큼 현실적이었다. 그 이유는 그의 연기 방식에 있었다. 그는 캐릭터를 흉내 내려 하지 않았다.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고 무엇을 사랑했는지를 이해하려 했다. 연기는 누군가가 되는 일이 아니라, 나와 다른 한 인간을 끝까지 이해하려는 과정이었다.

평론가 잰 브룩스는 그의 특별한 재능을 "좌절하고 뒤틀린 인간성을 품위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평했다. 그 말처럼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연기는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지나쳤던 침묵이 들리고,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시선 하나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의 인물들이 품고 있던 외로움과 후회, 죄책감과 희망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Issue 6 FEA Philip Seymour Hoffman / ⓒUNKNOWN

좋은 배우는 영화를 완성한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영화가 끝난 뒤부터 관객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배우가 있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그런 배우였다. 그는 평생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그 이해는 단순히 캐릭터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영화를 본 우리는 어느새 영화 속 인물보다, 우리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 후회와 결핍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영화는 끝나도, 그가 던진 질문은 오래 남는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 질문은 언제나 스크린 속 인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을 기억한다.




Editor / 배서진(@seoj_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