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진짜인 ‘척’하는 가짜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보면 솔직히 한숨부터 나온다.

첫째, 이걸 왜 묻지.
둘째, 어쩌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돈인데.
셋째, 갑자기 엄마 반찬, 아빠 잔소리, 동생들의 장난, 애인 목소리가 신파 드라마 속 주마등 장면처럼 차례로 스쳐가고… 뒤이어 몰려오는 큰 죄책감에 골치가 아파진다.

근데 나만 이런 게 아니다. 2021년, 미국 퓨리서치센터에서 진행한 설문에서 한국인들은 1순위로 물질적 행복을 꼽았다. 전 세계 선진국 국민들 중 유일하게. 둘째는 건강, 셋째는 가족 순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게, 그러니까 인간의 삶에서 나름 중요한 가치라고 인정받던 모든 게 한 순간에 증발하는 걸 아주 가까이서 목격한 적이 있다. 각별했던 친구의 엄마가 사이비에 빠진 것이다. 상대는 손만 대면 다 낫는다 으스대는 전형적인 악질이었다. 친구도 나도 간절하게 설득했으나 머지않아 곧 깨달았다. 이건 무조건 지는 게임이구나.

여러모로 굉장한 종교 집단이 등장하는 영화 미드소마 (Midsommar, 2019) ⓒelle

<믿음의 두 얼굴>

사이비(似而非)를 한자 그대로 풀면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 즉 진짜인 ‘척’하는 가짜다. 그러니 믿음엔 결코 죄가 없다. 잘못은 믿음을 악용한 대상에게 있는 것이지.

오히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다. 사랑이나 우정, 신뢰, 또는 신앙...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더 위험부담이 크다. 명확히 보장된 게 없으니. 이러한 가치들은 자주 물질적 가치와 견주어지며 위력을 과시한다. 허나 증거와 증명으로 검증된 걸 믿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믿음도 아니다. 지식과 인지에 가깝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를 모티브로 한 최영철 감독의 영화 ‘백백교(1992)’ watcha.com

바야흐로 불신의 시대. 글 초입에 등장했던 설문의 결과는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고, 체감되지 않는 가치들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음을 뜻한다. 어디 이 뿐인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뉴스들은 배신의 전제엔 항상 믿음이 있었다는, 잔인한 진리를 드러낸다.


<‘친구’란 이름의 적>

우라사와 나오키(浦沢 直樹)의 만화, ‘20세기 소년(20世紀少年, 1999-2007)‘은 믿음과 배신의 비극적 공생 관계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특히 주인공 켄지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장난 삼아 그린 낙서가 먼 훗날, 신흥 종교 집단의 계시로 둔갑한다는 스토리의 중심축은 오늘날 허황된 교리를 내세우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행태와 비슷하다.

20세기 소년에 등장하는 신흥 종교의 리더, '친구' ⓒbigcomics

아이들이 쓴 낙서집의 제목은 ’예언의 서‘. 꽤나 거창해 보이지만 내용은 잡지나 TV, 만화책에서 보던 뻔한 요소들을 짜깁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조직이 등장하고, 인류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지고, 최후엔 거대한 로봇이 출현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설정. 그리고 그 중심엔 수수께끼의 지도자 ’친구(ともだち)‘가 있다.

총 3부작의 실사영화로 제작된 20세기 소년 ⓒlemino.docomo.ne.jp

결국 대중의 불안과 구원 환상을 이용해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친구‘. 겉으론 신의 계시를 받아 앞으로 벌어질 위험들을 예언하고, 그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줄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상은 ‘예언의 서’로부터 힌트를 얻은 대테러 계획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건 스토리의 말미에 드러난 ‘친구’의 정체다. 그는 어릴 적 켄지 무리에 섞여 놀던 아이 중 하나였으나 놀이에서 소외되었다는 사소한 이유로 이런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던 것. 물론 만화에선 어른이 된 켄지가 ‘친구’를 저지하며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현실에선 글쎄, 가능할까?


<욕망을 구원하라>

대체 무엇이 그들을 ’믿도록‘ 만들었는가.

요새 자주 보이는 사이비에 관한 르포들을 보며 나는 이러한 근원적 물음에 도달했다. 그들의 교리는 대부분 상식을 벗어난 터무니 없는 것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도들의 충성심을 자극할 수 있었을까? 혹시 애초부터 논리 자체가 필요 없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꺠달았다. 교주들의 행색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에겐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상대를 사로잡는 ‘카리스마’.

카리스마라니. 이것이야말로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이럴 땐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의 영화에 기대어보자. 1999년 작인 '매그놀리아(Magnolia)' 를 선두로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 2007)', 이동진의 5점 만점작 ‘마스터(The Master, 2012)까지 폴의 영화에선 정말 다채로운 카리스마의 소유자들이 등장한다.

'매그놀리아'의 프랭크(톰 크루즈)는 여성공략법을 가르치는 강사다. 쉽게 말하면 컬트느낌의  세바시라고나 할까. 제목부터 같잖은 프랭크의 강의는 내용도 형편없다. '유혹하여 파멸시켜라'라는 어처구니 없는 슬로건만 봐도 짐작이 간다. 패션도 가관이다. 단발 올백 반묶음에 실크 셔츠, 촌스러운 베스트까지 길에서 마주치면 딱 피할 스타일이다.

하지만 강연대 위의 선 프랭크는 순식간에 청자들을 매료시킨다. 비결은 당당한 태도와 강렬한 눈빛, 그리고 거침없는 제스처. 결국 그의 강연은 연일 매진을 이루고, 책 출간에 공중파 인터뷰까지 전형적인 스타 강사의 절차를 밟아가기 시작한다.

ⓒcbr

이에 반해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일라이(폴 다노)는 작은 시골 교회에 부임한 젊은 목사로, 세상 무해한 선한 마스크를 보유 중이다. 항상 단정한 옷차림에 헤어도 정갈한 2대 8을 고수. 근데 이 순수한 청년이 세상에, 설교만 하면 180도 달라진다. 격정적인 언행과 안수 퍼포먼스, 나아가 ‘퇴마’까지 행한다. 이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피날레엔 구세주를 연기하며 불안에 사로잡힌 신도들을 홀리는 게 수법이다. 가녀린 소년의 외형에서 솟구치는 에너지 하며, 군중들을 쥐락펴락하는 능력 하며, 보는 내내 감탄만 나온다. 그러나 그 이면엔 권력과 돈에 눈이 멀어버린, 탐욕스러운 자아가 있다.

ⓒdecider

하지만 이 둘도 ’마스터‘의 랭커스터(필립 시모어 호프먼) 앞에선 한낱 애송이일 뿐이다. 앞선 두 리더는 연출된 캐릭터 느낌이 강하게 풍기지만, 랭커스터는 다르다. 실제 종교인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에서 영감을 얻어서 인지 교인들을 설득하는 방식이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탁월하다.

그는 상대에게 연속적으로 모호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정상적인 대화 리듬을 흐트러트린다. 이를테면,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로 태어나고 싶은가? 네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무엇인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나? 같은 것이다. 이는 전부 의도된 일이다. 두서없는 질문이 이어질수록 상대는 혼란에 빠지고, 덕분에 쉽게 심리적 경계를 허물어뜨릴 수 있게 되는 랭커스터표 스킬인 셈이다. 게다가 부드럽고도 단호한 어투까지.

ⓒalternateending

그러나 이번엔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랭커스터의 종교에 입교하게 된 프레디(호아킨 피닉스). 그는 분조장에, 전쟁 후유증에, 알코올 중독에... 그야말로 지상 최고 금쪽이다. 얼핏 보면 망나니 같은 프레디가 갱생을 위해 랭커스터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은 철저한 공존 관계다. 마치 ’다크 다이트(The Dark Knight, 2008)‘의 조커와 배트맨처럼, 랭커스터 역시 프레디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둘은 지배와 종속, 친밀과 의존, 추앙과 환대로 뒤엉킨 독특한 관계로 거듭나지만, 끝내 프레디는 치유를 가장한 랭커스터의 강압적 통제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자유를 향해 질주하는 프레디의 모습이 무척 홀가분해 보인다. 마치 맘껏 사랑했던 쪽이 후회도 없는 것처럼.


<군중은 이성을 원한 적이 없다>

쪽수가 많으면 무조건 이긴다. 과연 그럴까. ‘대중의 마키아벨리’라 불린 프랑스의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의 저서 ‘군중심리(Psychologie des Foules, 1895)’ 속 한 구절을 소환해 보자.

“군중은 이성(理性)을 원하지 않는다.”

말의 속뜻은 간단하다. 집단 속에서 개인은 논리보단 감정에 휩쓸리고, 복잡한 진실 대신 단순한 확신을 갈망한다는 것. 덧붙여 그는 군중 속 개인과 단독자로서의 개인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며, 개인의 개성은 군중 속에서 소실되고 되려 소속된 집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주장한다. 때문에 그는 군중을 선동에 쉽게 동요하는 존재이자, 각종 환상과 이미지를 이용해 집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연상호와 최규석의 공동 작업으로 화제가 되었던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2021)’은 이러한 군중심리의 핵심을 찌르는 작품이다. 지옥으로부터의 고지, 징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초자연적 현상을 세 개의 집단 - 새진리교, 소도, 화살촉 - 이 각각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다.

ⓒnetflix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군중의 취약성이 드러난다. 새진리교는 교주의 신격화를 통해 부와 권력을 잡으려 하고, 소도는 불합리한 고지의 실체를 파헤치려 한다. 이에 반해 화살촉 식구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본래의 거처를 떠나 따로 모여 살 정도로 끈끈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만의 언어로 설계된 세상을 차근차근 건설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큰 규모의 새진리교에 정면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영향력 있는 매체나 카리스마 있는 교주, 냉철한 두뇌나 사명감도 없이, 오로지 ‘맹목적인 믿음’만으로 말이다.

현실 곳곳에서 이성을 벗어난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이 세 집단에 속한 이들은 군중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실을 끈질기게 거부한다. 결국 이곳엔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 그저 각자의 입장이 있고, 그 입장을 대변하는 집단이 있으며, 그 집단이 만들어 가는 고유의 세계, 그리고 가장 꼭대기에 이 모든 걸 관전하는 무관심한 신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거대한 사건을 통과하여 어디로 향해 나아가려 하는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1995년,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사린 테러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르포르타주, ‘언더그라운드(アンダーグラウンド, 1997)에서 이러한 질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 끔찍한 사건 뒤엔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있었고, 교주인 이시하라 쇼코(麻原彰晃)가 있었다. 비록 소설가의 신분이지만,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인터뷰집을 집필하게 된 동기에 대해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옴진리교라는 ’사상‘을 순수하게 타인의 일로서, 이해할 수 없는 기형적인 것이라고, 건너편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1995년 3월 20일, 참혹했던 테러 현장 ⓒnbcnews

애석하게도, 어쩌면 믿음은 영영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를 살아가겐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배신이란 모순을 짊어지고서라도 기어이 믿음을 향해 도전하게 되는… 단 하나의 이유다.







Editor / 주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