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의 인생에서 삭제된 장면들

앤디워홀

역사는 언제나 극적인 순간에만 주목한다. 영화로 따지면 편집에만 몇 년을 공들인 극장판이고, 문학으로 따지면 숙련된 편집자의 매의 눈으로 다듬어진 정식 출판본인 셈이다. 음악이어도 별 반 다르지 않다. 숨 한 번만 삐끗해도 얄짤없이 아웃, 그렇게 수십 번의 테이크 중 단 하나의 버전만 세상에 공개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짜 삶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실제로는 군더더기 투성이에, 걸러내고 버려야 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계획대로는 절대 흘러가지 않는 하루, 이유 없는 집착, 누가 봐도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선택들, 그리고 무수히 쌓여가는 실패들. 인생은 결코 어엿한 완성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인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들의 위대한 ’업적‘만을 편집해 진열해 두었지만, 무삭제판 원본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개봉 당시 무려 절반에 가까운 분량이 삭제되어 상영되었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나는 녹음기와 결혼했다: 앤디 워홀>

현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팝아트의 아이콘, 앤디 워홀(Andy Warhol).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한결같다. 캠벨 수프 캔과 마릴린 먼로, 대량 생산과 소비문화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혁신가이자, 대중까지 사로잡는 아우라의 소유자. 게다가 은발과 선글라스로 각인된 독보적인 스타일은 패션계에선 여전히 영감의 대상이다.

하지만 무대 뒤편의 워홀에게는 꽤나 기괴한 취미가 있었다. 때는 1964년. 그는 한 상점에서 우연히 휴대용 녹음기를 하나 손에 넣었고, 이 기계는 그의 평생의 동반자로 남는다. 오죽하면 녹음기에게 와이프(My Wife)라는 애칭까지 붙였을까.

그렇게 그는 매일같이 녹음기를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다. 하지만 그 도가 너무 지나쳤다. 친구와의 시시콜콜한 대화는 물론 전화 통화, 이동 중인 택시 안, 하루가 멀다 하게 반복되는 화려한 파티 현장, 하물며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할 때도 녹음 버튼은 끈질기게 눌린 채였다. 이쯤 되면 와이프를 넘어선 분신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 기록들이 훗날 위대한 작품으로 이어질 것이라 짐작했을 것이다. 워홀이 워낙 괴짜인 데다가 매번 새로운 시도에 목말라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간다. 테이프에 담긴 내용의 대부분은 금세 잊힐법한 평범한 소음들 뿐. 그럼에도 쌓인 녹음테이프는 수천 개. 이쯤 되면 단순한 수집을 넘어선 광기의 수준이다. 대체 왜, 그는 이토록 녹음에 집착했던 것일까?

실제 그의 목소리가 담긴 인터뷰 | Andy Warhol voice | Andy Warhol talking for 6 minutes

그의 자서전 <앤디 워홀의 철학(1975)>에는 이 ‘녹음기 와이프’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의외로 유리멘탈이었던 그는 관계에서 오는 상처나 불안을 희석시키기 위해, 이 기계의 힘을 빌린다. 흥미로운 대화는 ‘흥미로운 사건의 기록’으로, 갈등의 대화는 ‘긴장과 충돌의 기록’으로. 어떤 사건이던 녹음되는 순간, 그건 그저 기록으로 변한다. 실제의 감정은 아득해지고 객관적인 ‘데이터’만 남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워홀은 두려운 것들과 거리를 둔다. “녹음기를 얻게 되면서 내 감정적인 삶은 끝났지만, 나는 그것이 사라진 것이 기뻤다.”는 그의 말처럼, 워홀에게 녹음기는 세상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종의 방패였는지도 모른다.


<체스에 목숨 바친 초현실주의자: 마르셀 뒤샹>

어느 날, ‘R. Mutt’라는 서명이 새겨진 남성용 변기를 들고 미술관에 걸어 들어오는 의기양양한 한 남자. 그의 정체는 20세기 미술의 판도를 뒤흔든 문제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다. 만약 그의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오프닝은 무조건 이 장면으로 시작될 것이 분명하다.

자, 편집점을 이렇게만 잘 잡았다면 아무 탈 없었겠지만, 뒤샹은 명성의 정점에서 돌연 다른 직종(?)으로 판을 옮긴다. 바로 체스다. 그의 체스 사랑에 대한 일화는 차고 넘친다. 신혼 생활 중 체스에 지나치게 몰두하던 그에게 화가 난 아내가 체스판에 말들을 모조리 붙여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1년도 채 이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선 ‘주위의 모든 것들이 기사(Knight)나 퀸(Queen)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중독자스러운 면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거장의 기운이 어디 가겠는가. 작품으로 가야 할 열정이 체스로 흘러들어 갔으니, 그 결과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단순한 아마추어를 넘어 무려 네 차례나 프랑스 국가대표로 국제 체스 올림피아드에 출전했던 경력도 있다.

사실 체스에 대한 뒤샹의 관심은 꽤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었다. 초기 회화작인 <체스 게임(The Chess Game, 1910)>이나 <체스 선수들의 초상(Portrait of Chess Players, 1911)>를 보면 알 수 있다.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경쟁 속 긴장감 있는 공기가 잘 스며있는 작품이다. 이미 그에게 체스는 단순한 스포츠의 개념을 넘어서, 더 높은 경지에 있는 무엇이었다. 어쩌면 예술과 비견될 정도로. “모든 예술가가 체스 선수는 아니지만, 모든 체스 선수는 예술가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으니.

1968년, 뒤샹은 전위 음악가였던 존 케이지(John Cage)와 역사적인 대국을 펼친다. 하지만 평범한 경기는 아니었다. 체스판 각 칸에 광센서를 부착하여 말들이 움직일 때마다 조명이 바뀌고 전자음이 울려 퍼지게 설계한 뒤, 한 수가 진행될 때마다 음악이 연주되는 일종의 ‘공연’을 펼친 것이다. 이는 관객에게 독특한 청각적 경함을 선사한 퍼포먼스, <리유니온(Reunion)>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체스였을까. ”나는 밤낮으로 체스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다. 체스는 예술의 모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체스는 상업화될 수 없다. 또한 체스는 예술보다 훨씬 순수하다.“ 그렇다. 뒤샹에게 체스는 변덕스러운 세상과 속물적인 인간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변치 않는 규칙과 주어진 조건 안에서, 오직 자신만의 판단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해 나가는 게임. 그는 미술가의 역할로 대중과 평단의 인정을 받았지만, 아마 진정으로 원했던 역할은 세계 제일의 체스 플레이어가 아니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인 심령술사: 아서 코난 도일>

워홀은 기계, 뒤샹은 체스에 삶의 상당 부분을 바쳤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냉철한 이성을 그려낸 또 한 명의 천재는 아예 불확실한 영혼의 세계로 뛰어들길 결심한다.  바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창시자, 작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다. 치밀한 관찰력과 빈틈없는 논리로 수많은 범죄를 파헤치는 홈즈의 모습은 당시 대중의 마음을 빼앗기엔 충분하다. 신발 밑창에 묻은 흙의 종류나 옷깃의 구김 만으로도 인물의 직업과 동선까지 알아내는 비범한 추리 실력, 게다가 범죄를 풀어가는 과정 속엔 명확한 증거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 사고의 진수가 담겨있다.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제거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믿기 힘들더라도 진실이다.”라는 홈즈의 대사처럼, 코난 도일이 구축한 세계 속에 미신이나 맹점 따위는 발조차 디딜 수 없다.

아서 코난 도일

하지만 그렇게 당당히 세상을 설득해 나가던 추리의 거장에겐 남모를 비밀이 있었다. 그가 최초의 홈즈 작품을 집필하던 1880년대, 20대 의사 시절부터 작품의 방향성과는 정반대인 영혼과 초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함께 자라나고 있던 것. 성공한 작가로 화려한 부와 명성을 쌓아가던 전성기 내내, 한편으로는 밤마다 유령을 부르는 강령회를 전전하며 심령 현상을 탐구하는 비밀스러운 이중생활이 이어진다.

그러던 도일은 인생 말미에 이르러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만약 영화였다면 필히 삭제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과학과 심령현상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그는, 오히려 심령술 역시 탐구와 증명이 가능한 영역이라 믿었다. 도일은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남은 삶, 명성, 그리고 재산까지 초현실현상을 연구하는데 송두리째 쏟아붓기 시작한다. 심지어 심령술에 관한 저서 <새로운 계시(1918)>와 <심령술의 역사(1926)>를 잇달아 발표하며 세계 각지에 강연까지 다닐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심령술의 역사(The History of Spiritualism, 1926)>

이러한 도일의 집착은 결국 코팅리 요정 사건을 통해 대중의 심판대에 오른다. 1917년, 잉글랜드 브래드포드의 코팅리(Cottingley)에서 10대 소녀들이 요정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킨다. 사진의 진위 여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음에도, 도일은 이 사진을 초자연적 현상의 결정적인 증거라 철석같이 믿는다. 1920년엔 <스트린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에 이 사진을 소개하고, 요정의 실존을 옹호하는 장문의 기사를 발표했을 정도다.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 물질적인 20세기의 마음은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인생에는 매력과 신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의 기사는 이러한 구절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진은 먼 훗날 조작인걸로 밝혀진다.

도일의 이러한 집착은 그저 광기였을 뿐인가? 결코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비극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과 가족들을 차례로 잃게 되며, 그는 변한 것이다. 깊은 절망에 빠진 그에게 심령술은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죽은 아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유일한 구원이 되어주었을 테니.


<비둘기와 사랑에 빠진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

대 전기 문명의 기초를 다진 위대한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의 이야기 역시 빠질 순 없다. 그 역시 앞서 등장한 세 인물만큼이나 수많은 공을 세웠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행으로도 유명하다. 숫자 3에 대한 강박으로, 손을 세 번 연속으로 씻고, 어떤 건물에 들어가기 전엔 그 주위를 세 바퀴 돌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무슨 이유에선지 진주를 혐오해 진주 목걸이를 착용한 여자와는 말도 섞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 제일은 비둘기와의 러브 스토리다. 그는 거의 매일을 뉴욕의 공원에서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시간을 보냈고, 다친 비둘기는 집까지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호텔에 묵을 때에도 비둘기를 방에 들여놔 방이 엉망진창이 되는 일도 허다했다고.

테슬라는 평생 독신이었다. 자신의 연구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결혼도 마다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을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어떤 흰 비둘기와 사랑에 빠진다. 그것도 쌍방으로. 물론 비둘기의 속사정은 모른다. 모든 건 테슬라가 훗날 한 기자에게 고백한 것이니까. ‘나는 마치 이성을 사랑하듯 그 비둘기를 사랑했고, 그녀의 존재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주었으며, 또한 훗날 그녀가 숨을 거두었을 때 자신의 삶도 함께 끝났음을 직감’했다고. 그 마음이 진심인 건 잘 알겠지만, 현재 테슬라의 명성을 생각하면 비현실적이다 못해 짠할 정도다.

팬들이 합성한 테슬라와 비둘기 사진

세상의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었던 천재들의 황당한 일상. 그들의 업적을 빛내기  위해서라면 필사적으로 도려내야 할 장면들이지만, 결국 그 기이한 도피가 그들을 무사히 살게 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는 임의대로 역사에서 그 장면들을 삭제했으나, 과연 그것을 그저 ‘쓸모없는 장면’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겉보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그 순간들까지 전부 포개어져야만 비로소 한 사람의 온전한 생애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세상을 뒤흔든 거대한 유산 뒤에는, 너무나 위태롭고도 인간적인 영혼들이 머물러 있다.





Editor / 주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