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제대로 박수치고 있습니까
박수
12분 동안의 행위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 남자가 무대에 올랐다. 그날의 주인공은 영화의 전설, 찰리 채플린이었다. 그가 등장하자 객석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같은 행위를 시작했다.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박수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1분, 2분, 5분. 약 12분 동안 이어진 기립박수.
그의 업적을 생각하면 12분쯤이야 충분히 바칠 수 있을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인간은 과연 12분 동안 감동할 수 있을까. 손바닥이 얼얼해지고, 옆 사람의 박수 소리가 귀를 때리고, 팔이 슬슬 아파올 때까지도. 처음에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5분 뒤에도, 10분 뒤에도 과연 그랬을까? 혹시 어느 순간부터는 박수를 멈출 타이밍을 놓친 건 아닐까. 물론 그들의 진짜 마음은 알 수 없다. 다만 이 장면은 우리가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치는 박수를 조금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대체 박수를 치는 걸까.

너무나 기특한 행위
짝짝, 누군가 무대에 오르면 손뼉을 친다. 좋은 일이 생겨도 치고, 발표가 끝나도 치고, 상을 받아도 친다. 손바닥이 조금 얼얼해져도 계속 친다. 상대는 기뻐하고, 나는 아픈 손을 잠시 털어본다. 생각해보면 박수는 참 기특한 행위이다. 내 손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남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니까. 그저 두 손을 부딪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축하와 응원, 감탄을 전할 수 있다. 내 손바닥을 희생해 남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일이라니. 어쩌면 박수는 세상에서 가장 간편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특함을 너무 일찍 잊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늘 박수를 기다리는 것이다. 누군가 박수를 보내지 않으면 서운해하기도 한다. 남을 기쁘게 하려고 시작한 행동이 어느새 당연히 받아야 하는 반응이 되어버렸다. 마치 무대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이유만으로 박수를 받을 권리가 생긴 것처럼.

감동도 형식적인 외주일 수도

박수의 기원을 생각해보자. 고대 로마에서는 공연을 보고 박수의 종류와 방식으로 만족도를 표현했다. 프랑스 극장에는 돈을 받고 박수를 쳐주는 전문 박수 부대, ‘클라크(claque)’까지 있었다. 관객의 반응을 돈으로 사서 공연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감동도 형식적인 외주를 줄 수 있었던 셈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이 끝난 뒤 박수를 치는 관습이 있었다. 배우가 다른 인물을 연기할 수 있었던 건 영혼이 몸에 깃들었기 때문이고, 공연이 끝난 뒤 박수로 그 영혼을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확한 기원으로 확정된 설명은 아니지만, 적어도 박수는 점점 당연시되는 관습처럼 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관습은 강화되어 박수는 감탄을 표현함과 동시에 예의를 지키는 수단이 되었다. 친구가 발표를 끝냈으니까 박수를 친다. 공연이 끝났으니까 박수를 친다. 상사가 연설을 끝냈으니까 박수를 친다. 이때 박수는 ‘정말 좋았다’보다는 ‘잘 들었습니다’, ‘감동했다’보다는 ‘수고하셨습니다’에 가깝다. 물론 진심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고, 어색한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문제는 그 예의가 당연한 의무가 되는 순간이다. 박수가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반응이 되어버리면, 우리에게 박수는 그저 자동반사적인 기계의 움직임과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그 박수의 목적

영화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 평생 자신이 세트장 안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몰랐던 트루먼은 마침내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선다. 수십 년 동안 그의 인생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트루먼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문을 나서자, 관객들은 자신의 집에서, 직장에서, 술집에서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보낸다. 마침내 자유를 얻은 한 사람을 향한 박수다.

그런데 과연 그 박수가 축하의 박수일까.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관객들은 트루먼을 응원했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고, 자유를 찾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가 자유를 얻기 전까지 그들은 그의 인생을 구경하며 즐거움을 얻었다.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그가 벗어나려던 세계를 지탱해 온 사람들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과 그 사람을 위하는 행동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박수를 보내는 것만으로 우리는 정말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박수는 참 편리한 것이다. 손뼉을 치는 순간만큼은 내가 그 사람을 응원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니까.
때때로 권력이 되는 박수

한 사람이 박수를 치는 것과 모두가 박수를 치는 것은 다르다. 박수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것은 감탄을 넘어 동의의 증거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두가 박수를 쳤다는 사실이 정말 모두가 동의했다는 뜻일까? 어쩌면 아무도 먼저 손을 내리지 못했을 뿐인데.

박수는 시작보다 끝이 어렵다. 앞을 본다. 아직 친다. 나도 친다. 옆을 본다. 저 사람도 친다. 나도 친다. 그러다 누군가 손을 내리면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손을 내린다. 참 이상하다. 박수를 멈추는 데에도 눈치가 필요하다. 누군가 먼저 시작하고, 누군가 먼저 멈추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서로의 행동을 살핀다. 박수는 혼자 치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사회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강압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내 마음보다 주변의 분위기가 먼저 손을 움직이게 할 때도 있다.
모든 것에 치는 박수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박수를 친다. 축하하기 위해, 응원하기 위해,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가끔은 다들 치니까. 그러다 보니 박수를 보내는 마음은 잊고, 박수를 받는 일만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자. 박수는 원래 기특한 행위였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려고 내 손바닥을 부딪치는 일. 그 사람의 성취를 인정하고, 수고를 알아주고, 감동을 표현하는 일. 그렇기에 박수는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기꺼이 보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박수의 의미는 변했다. 그저 다들 치니까 치는 것. 이제는 그런 박수만큼은 그만두자. 공연이 끝났다고 무조건 손뼉을 치지 말고, 누군가 상을 받았다고 자동으로 손을 부딪치지 말자. 대신 정말 좋았다면 좋았다고 말하고, 감동했다면 무엇에 감동했는지 이야기하자. 박수보다 훨씬 귀찮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박수는 여기까지

모든 박수를 진심으로 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모든 박수를 의심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제 박수를 칠 일이 생긴다면 한 번쯤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 정말 좋아서 손뼉을 치는 걸까? 아니면 모두가 치고 있기 때문에 치는 걸까?
박수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꺼이 건네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끔 손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이 글을 다 읽었다고 박수를 치려는 분이 있다면, 부디 참아주시길. 이 글은 박수받으려고 쓴 글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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