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면 까먹어 버리는 당신 ‘기억의 궁전’을 세워라

기억의 궁전

하루만에 발표문 다 외우는 방법 <기억의 궁전>

연인 간에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한때는 상대의 휴대폰 번호를 외우고 있는지가 가장 기본이었다. 불시에 물었을 때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천하의 역적 취급을 받던 그 시절. 번호도 지금보단 한 자리 줄어든 열 자리였으니 그나마 해 볼만 하긴 했다. 요즘처럼 휴대폰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시대엔 통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과거엔 정말 그랬다. 친구와 지인의 전화번호를 손바닥에 적어두고, 생일이나 기념일을 일일이 머릿속에 새기고, 새로운 장소로 가는 길을 묻고 물어서 몸으로 익히는 게 일상이었다.

지금이 배경이었다면 시작조차 불가능했을 영화, 접속(1997) / ⓒimdb

그렇게 2026년 현재, 우리는 모두 바보가 되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방금 연인의 번호를 떠올렸는데... 맙소사, 010 이후가 뿌옇다. 그나마 제대로 외우고 있는 건 엄마 번호 정도다. 그렇다. 이제 기억은 인간의 손을 떠나버렸다. 다행인 건, 그래도 사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다. 끙끙대며 뇌 속에 저장하는 대신, 기업에서 외주를 맡기듯 기계에게 전부 입력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 놀랄 건 없다. 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은 원래 망각에 취약한 존재라는 걸. 그래서 더욱 의문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스마트폰도 클라우드도 없이, 오직 기억력에 의존해 각종 지식과 역사, 신화나 철학 등을 끈질기게 보존해 온, 인간만의 독특한 행보가 말이다. 혹시 그 속엔 어떤 ‘비법’이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희생자를 기억하라]

이에 대한 힌트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Sīmōnidēs)로부터 찾을 수 있다. 시인들의 전성기였던 기원전 5세기 즈음은, 이미 문자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과 노래가 지배하던 ‘구술 문화’의 시대였다. 파피루스 종이가 존재했지만 오늘날처럼 메모가 일상화되진 못했으며,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지식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널리 전파하려면 정보를 머릿속에 통째로 각인시키고, 그것을 다시 말로 전해야만 했다. 물론 개인의 사상과 작품들 역시 그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암송’의 기술은 당시 시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겐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시의 성격 역시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혼자 조용히 읽는 텍스트라기보다는, 축제나 연회에 모인 관객들을 향해 낭송되는 ‘공연’에 가까웠다. 자신이 직접 쓴 작품을 외워 읊는 시인의 생생한 목소리와 몸짓을 통해, 대중들은 예술의 경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literatureandhistory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기억의 역사를 바꿔놓은 한 사건이 벌어진다. 고대 그리스 9대 서정 시인에 선정될 만큼 인기 절정을 달렸던 시모니데스. 그는 여느 때처럼 한 귀족의 연회장에 초대되어, 능숙한 실력으로 축사를 읊는다. 문제는 행사가 끝난 뒤에 발생한다. 시모니데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연회장의 천장이 무너져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잔해 속에 깔린 수많은 사망자들. 게다가 유족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만큼 시신은 훼손된 상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뒤늦게 나타난 시모니데스는 죽은 이들의 신원을 전부 파악해낸다. 대체 어떻게.


[머릿속에 궁전을 지어라]

그는 폐허가 된 관객석을 바라보며, 비극이 덮치기 직전, 무대 위에서 자신이 바라보았던 연회장의 풍경을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되살려내기 시작한다. 누가 기둥 옆에 있었는지, 누가 누구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지, 누가 문 앞 세 번째 자리에 있었는지. 여기서의 핵심은 그가 관객들의 생김새나 옷차림보다,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즉 관객들의 장소와 위치 정보에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시모니데스는 하나의 거대한 통찰에 이른다. 개별적인 대상을 독립적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그 대상이 익숙한 장소와 결합되었을 때 기억의 능률이 폭발적으로 오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자신만의 기억법을 발전시켜 나간다. 머릿속에 가상의 익숙한 공간을 세워두고, 기억해야 할 정보들을 그 안에 배치한 뒤, 필요할 때마다 그곳을 거닐며 기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19세기 미국의 교육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엠마 윌라드(Emma Willard)의 기억의 궁전 / ⓒanimaloci.org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천재들의 기억법이라 불리는, ‘기억의 궁전(Method of Loci)‘의 시초다. 이 기술은 수백 년 동안 여러 세대를 거치며 체계를 갖추어 나갔고, 고대 로마에 이르러 비로소 정식화된다. 특히 당시 원고 한 장 없이 몇 시간씩 긴 연설을 이어가야 했던 로마의 정치인과 웅변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thecollector

[진짜로 이게 된다]

단지 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억력이 좋아질 수 있을까? 답은 Yes! 정말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과학계 역시 이에 대해 적극 동의하고 있으니. 여기, 신경과학 학술지 [eNeuro]에 발표된 연구를 살펴보자. ‘기억의 궁전’을 사용하는 참가자들의 뇌를 fMRI(자기 공명영상법)와 뇌파로 분석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인간의 뇌에서 공간을 인지하는 부위와 기억을 형성하는 부위는 모두 ‘내측 측두엽’으로 동일하다. 때문에 이 기억법을 쓰는 경우, 이 부위의 세포들이 압도적으로 활성화되며 뇌파가 기억하기 가장 완벽한 상태로 동기화된다는 것이다.

fMRI 결과: 따뜻한 색은 나중까지 기억되는 항목, 차가운 색잊히는 항목에 대한 신호 / ⓒeneuro.org

실제 실험 참여자의 다수가 일반적인 암기법보다 기억의 궁전을 활용했을 때 훨씬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 우리 뇌는 진화론적으로 공간을 기억하는 능력이 가장 발달되어 있으며, 기억의 궁전은 그 타고난 시스템을 이용하는 가장 과학적인 치트키인 셈이다. (참고: Spatial Mnemonic Encoding: Theta Power Decreases and Medial Temporal Lobe BOLD Increases Co-Occur during the Usage of the Method of Loci, [eNeuro] 2016,12, 21)


[당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500년 전 시모니데스가 발견하고, 현대 뇌과학이 증명한 이 강력한 무기를 우리도 사용할 수 있을까?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psychuniverse

1단계: 익숙한 ‘궁전’ 고르기

우리는 초보자다. 그렇기에 머릿속으로 구조를 쥐어짜야 하는 낯선 공간은 피해야 한다. 눈을 감고도 구조와 배치가 훤히 그려지는 공간을 선정하자. 지금 살고 있는 집이나, 매일 지나다니는 거리, 단골 카페 등을 추천한다.


2단계: 이동 동선 정하기

장소를 정했다면, 그곳에 진입해 전부를 크게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루트를 짠다. 그리고 그 동선 위에 있는 가구나 물건들을 정보를 저장할 ‘기억의 수납장’으로 지정하라. 순서는 항상 일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현관문을 열고 > 소파를 지나 > 책장을 둘러본 뒤 > 옷장을 열어보고 > 침대에 눕는다.


3단계: 기억할 정보를 ‘시각적 이미지’화 하여 배치하기

이제 외워야 할 정보들을 앞 단계에서 지정한 자리에 하나씩 겹쳐둔다. 이때, 하나의 팁은 이미지가 비현실적이거나 자극적일수록 기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예를 들어, 장보기 리스트: 계란, 커피, 수박이라 하면 - 현관문을 열자마자 큰 바위만 한 계란이 엎어져 바닥이 온통 미끌거리는 상상, 그 이후 거실에 들어서니 새하얀 소파에 커피를 쏟아져 우리나라 지도가 그려지고, 책이 있어야 할 책장엔 수박이 칼 각으로 쪼개진 채 빈틈없이 꽂혀있다. 뭐, 이런 식이다.


4단계: 장소를 돌아보며 복습하기

배치가 끝났다면, 다시 머릿속으로 동선을 따라 걸어본다. 현관문을 보면 미끌거리는 바닥과 함께 계란, 소파에 물든 검은색 지도를 마주하면 커피, 과즙이 흥건한 책장을 바라보면 수박이 떠오를 것이다. 자주 돌아다닐수록 기억의 능률은 높아진다.


5단계: 하지만 한계는 있다

기억의 궁전이 좋은 기억법이라는 건 의심할 나위 없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결국엔 케바케다. 단순한 영어 단어나, 역사적 사건의 순서, 발표문이나 업무 자료 같은 단편적이면서도 분절적인 정보엔 강점을 보이지만, 원리나 개념처럼 흐름을 파악해야 이해가 가능한 정보는 한계가 있다. 불충분한 부분은 공부를 통해 채워가는 걸로.


[그들처럼 되고 싶다면]

이 기억법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단연 다양한 작품 속의 천재 설정 캐릭터들 덕분이다. 스크린 속에서 그들이 펼치는 두뇌 플레이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으니까.

셜록홈즈의마인드팰리스 (Sherlock(BBC), 2010-2017)

괴팍한 성질에 히키코모리 재질, 게다가 가끔은 사이코패스라 착각할 만큼의 냉랭한 이성. 사건 해결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사회에서 매장당하고도 남을 셜록 시리즈의 주인공 셜록(배네딕트 컴버배치)은 이 기억의 궁전을 시청자들에게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여러 단서가 얽혀있는 복잡한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눈을 감고 자신의 머릿속 궁전을 찾는다.

ⓒmihagazvoda

그의 궁전은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박물관, 또는 첨단 과학 기술 센터처럼 묘사된다. 그는 가상의 공간을 걸어 다니며 과거에 읽었던 신문 기사, 화학 주기율표, 용의자의 프로필 같은 텍스트들을 손으로 넘겨가며 단서를 찾기도 한다. 방대한 지식을 담은 ‘검색용 디지털 아카이브’의 형태다.

ⓒcannonballread

그러나 가끔은 단순한 지식 보관소가 아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도 사용된다. 시즌 3, 에피소드 3화에서 셜록이 메리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짧은 3초 동안, 형과 부검의 몰리 등 그의 지인들이 등장해 생존 방법을 일러주는 장면을 보면 그렇다. 총에 맞았을 때 어느 방향으로 쓰러져야 장기 손상이 적은 지, 쇼크를 방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들과 대화하며 나름의 방법을 습득한다. 결국 궁전의 지하까지 내려가 자신의 숙적이자 가장 두려웠던 존재인 짐 모리어티(앤드류 스콧)를 마주한 뒤, 그로부터 자신의 파트너인 존 왓슨(마틴 프리먼)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음과 동시에 의식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기억의 궁전 속을 헤매는 셜록 / ⓒvox

한니발의거대한대성당 (Hannibal(NBC), 2013-2015)

"한니발 렉터 박사의 기억의 궁전으로 이어지는 입구는 그의 정신세계 한복판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 있다. 손짓 하나로 간단히 찾을 수 있는 빗장을 밀어 올리고 그 기이하고 섬세한 문을 열면, 거대하고 밝은 초기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진 공간이 나타난다. 그곳은 수많은 방과 복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모 면에서 이스탄불의 토카피 궁전과 견줄 정도로 거대하다. 궁전은 훌륭한 조명 아래 아름답게 배치된 예술품들의 향연장이다. 각각의 물건에는 그의 기억이 입력되어 있고, 그 기억들은 셀 수 없는 방과 복도를 따라 다른 기억으로 이어진다.“ - 소설 [양들의침묵]

토마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초판본(1988) / ⓒamazon

토마스 해리스(Thomas Harris)의 원작 소설과 NBC [한니발]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기억의 궁전은 셜록의 것과는 달리 훨씬 장엄하다. 음식 취향만 좀 그렇지, 예술 전반으로 굉장히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미감을 가진 한니발 렉터(매즈 미캘슨)에게 딱 어울리는 모양새다. 전투복이나 다름없는 쓰리피스 슈트 풀착장에 과감한 컬러 팔레트, 웬만하면 소화하기 힘든 체크무늬까지. 데일리 룩만 보아도 헤비한 그의 취향이 쉬이 읽힌다.

ⓒfromtailorswithlove

원작 소설 속 친절한 설명처럼 그의 기억의 궁전은 거대한 대성당을 닮아있다. 이곳은 자신의 독특한 심미안과 과거의 기억들이 혼재된 은신처나 다름없다. 오래 전 감상했던 명화의 섬세한 붓터치까지 재현되어 있는 순도 높은 예술품들의 전시장이기도 하지만, 때론 잔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도피성으로 이곳을 택하기도 한다. 하나 명백한 건, 이곳은 윤리보다 미가 절대적으로 우선시 되는 곳이라는 것.

ⓒfromtailorswithlove

패트릭제인의동네마실느낌, (The Mentalist, 2008-2015)

천재적인 관찰력과 빠삭한 심리학적 지식을 이용해, 마치 초자연적 힘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남자.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패트릭 제인(사이먼 베이커)은 사실 어떤 초능력도 없는 가짜 영매 출신이지만, 사람 심리를 읽어내는 자신만의 기술을 활용해 캘리포니아 수사국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며 온갖 사건들을 해결한다.

ⓒbustle

제인의 궁전은 훨씬 평범하다. 기억의 궁전 건설 방법의 정석을 따르고 있는 셈. 그는 거창한 공간 대신 자신이 실제로 다녀왔던 현실의 공간들을 그때그때 돌려가며 기억의 장소로 활용한다. 완벽한 실전파다. 카지노에서 돈을 너무 많이 딴 나머지 쫓겨난 적도 있다. 이거야 말로 이 탁월한 기억법이 낼 수 있는 가장 속물적인 시너지가 아닌가.

ⓒnowtv

시즌 5의 에피소드 14화에서는 직접 대학 강단에 서서 기억의 궁전에 관한 강의를 펼치기도 한다. 학생 모두가 의심 섞인 눈초리를 보내는 가운데, 테이블 위에 임의로 나열된 박제 동물 30마리의 순서와 종류를 단 몇 초 만에 몽땅 외우는 엄청난 위력을 선보이며 자신의 기억법을 증명한다. 그는 “인간의 두뇌가 제대로 작동하기만 하면 엄청나게 효과적”이라 말하며, “때로는 미래를 보는 것과 같은 기적적인 일도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과연 그럴까 싶지만, 시리즈 속 그의 활약을 보다 보면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medium

자, 이제 당신만의 궁전을 건설할 준비가 되었는가? 비록 비극의 폐허에서 태어났지만 인류에겐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 준 그곳이, 곧 당신이 마주할 가장 익숙한 풍경이 되길 바라며.






Editor / 주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