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언론
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묘한 소외감이 느껴진다. 온갖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보도들 속에 치이다 보니, 대한민국엔 오직 두 부류의 인간들만 사는 것만 같은 착각조차 든다. 맹목적으로 저쪽을 증오하거나 그게 아니면 광적으로 이쪽을 옹호하거나.
문득 한 갓난아이를 붙들고 서로 자신의 핏줄이라 주장하던 두 여인에게, 그럴 거면 아이를 반으로 갈라 나누어 가지라는 판결을 내렸던 솔로몬의 재판이 떠오른다. 이 이야기에서 진짜 어머니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아이를 포기했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은 다르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반으로 갈라버리겠다는 가짜 어머니의 아집처럼, 자신의 대의와 진영의 승리를 위해 사회의 균열을 깊게 만드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다.

<해장국 저널리즘의 시대>
“그렇다면 언론은 본래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공정과 공익, 그리고 정의. 언론이 앞세우는 명분은 언제나 마땅하다. 문제는 그런 가치들 자체가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왜곡은 언제나 그럴듯한 명분 아래에서 일어났다. 국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떤 신념을 위해서. 언론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언론이 스스로 특정한 대의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검증보다 확신이 앞서기 시작한다.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끝까지 살피기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그 위에 섣부른 판단을 쌓아 올린다. 이번에도 문제는 명분 자체가 아니다. 그 명분이 의심과 검증을 밀어내는 순간, 왜곡이 시작된다는 것에 있다.

허나 언론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다양한 시각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서로 대화할 수 있게끔 이끄는 존재에 가깝다. 광장에 나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피력하는 이들도,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도, 그 어떤 이도 편향된 이분법의 틀 속에서 배척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 관점들을 환영하되, 그것을 ’우리 편의 무기‘나 ’저쪽 편을 향한 증오‘로 변질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널리즘이 끝까지 지켜내야 할 기본이다.
그러나 현실은 암담하다. 오죽하면 ‘해장국 저널리즘’이라는 기괴한 표현까지 생겨났을까. 이는 골치 아픈 팩트 체크와 복잡한 맥락은 뒤로한 채, 정치적 울분을 속 시원하게 풀어줄 한 그릇의 해장국 같은 요즘 뉴스들의 성격을 저격한다. 어느새 뉴스는 더 이상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창이 아닌,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는 거울이 되어 버렸다.
<폭주하는 뉴미디어>
이러한 한계 속에서 뉴미디어는 그럴듯한 대안이 되어주었다. 기득권의 게이트 키핑을 견제함과 동시에, 기존 레거시 미디어가 담지 못하는 다양한 관점을 대변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시작은 좋았다. 누구나 자유롭게 스피커를 쥘 수 있었고, 정보 수신의 문턱도 낮아졌다. 그렇게 뉴미디어는 시대가 요구한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뉴미디어 역시 비슷한 한계에 부딪혔다. 조회 수와 구독자 수가 곧 영향력이자 돈이 되는 생태계 속에서, 사실을 끝까지 검증하는 기사보단 함께 분노하고 함께 환호할 수 있는, 즉각적이며 자극적인 콘텐츠가 월등히 사랑받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의 빈자리엔 상상과 음모가 들어차고, 최소한의 검증조차 되지 않은 가짜 뉴스들이 판을 쳤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전보다 다채로운 시선을 경험하고 더 많은 정보를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음에도, 시야는 오히려 더 좁아졌다. 서로 다른 시각은 적대의 근거가 되었으며, 견해와 해석은 어느새 사실 못지않은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견해와 해석은 결코 사실이 될 수 없다. 미디어의 오만과 폭주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고, 더 깊은 우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렇기에 다시금 이 질문을 상기해야 한다. 언론은 본래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지금부터 살펴볼 세 건의 실화는 그저 훌륭한 기자들의 성공담이 아니다. 속물적 영리나 진영의 이익을 떠나, 오직 눈앞의 ‘팩트’에 의지하여, 언론의 진정한 존재 이유를 증명했던 이들의 기록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아야 할 것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개인이 아닌 시스템에 집중하라>
:보스턴 가톨릭 사제 성추행 은폐 사건, 영화 <스포트라이트>
2002년, 미국의 일간 신문 ‘보스턴 글로브(The Boston Globe)'의 탐사보도팀은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의혹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몇몇 성직자의 개인적인 일탈로 보였지만, 취재가 이어질수록 사건의 실체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가톨릭 교단은 아동들의 피해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으며, 가해 사제들을 다른 본당으로 전근시키며 범행이 반복되도록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들은 수개월 동안 수천 장의 법원 기록을 손수 뒤지고, 철저히 외면받던 피해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증언을 확보한다. 그리고 마침내 개인의 범죄 뒤에 감춰져 있던 조직적 은폐의 시도를 세상에 드러낸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감춰왔던,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폭로한 것이다. 당시 보스턴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가톨릭 신자였음을 감안하면, 기득권의 저항과 대중의 비난을 감내할 각오 없인 취재 시도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사보도팀은 특정 진영의 눈치를 보거나 종교적 성역에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이 일을 해냈다. 이 보도는 당연히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2003년 퓰리처 상 공공서비스 부문을 수상하며 탐사보도의 새로운 기준으로 남았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에는 그 집요한 추적의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탐사보도팀장 윌터 로빈슨(마이클 키튼)이 막 취재를 시작하려 하는 동료들에게 충고하는 장면이다. “개인이 아닌 시스템에 집중해야 해.” 이 한 마디는 저널리즘이 사건을 바라보는 가장 원칙적인 시각을 대변한다. 좋은 언론은 자극적인 개개의 사건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한 걸음 더 깊이 침투하여, 왜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나아가 어떤 힘이 침묵과 은폐를 유지하게 만들었는지를 끝까지 파헤친다. 사건의 본질은 대개 개인이 아닌 구조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수사 기관이 흘려주는 정제되지 않은 정보, 관계자가 던져주는 폭로성 찌라시들을 그대로 복붙한 기사들은 그저 몇 시간 동안 대중의 시선을 붙들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개인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릴 위험을 갖음과 동시에 거대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한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희생양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 희생양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시스템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저 눈앞에 시든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숲 전체를 끝까지 응시해야만 한다.
<권력보다 국민의 알 권리>
:펜타곤 페이퍼 특종 보도, 영화 <더 포스트>
1971년, 미국 전역은 충격에 휩싸인다.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가 미 국방부의 극비 문서인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의 일부 내용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무려 7천 쪽이 넘는 이 보고서에는 트루먼부터 닉슨 대통령에 이르는 4대 정권 동안, 베트남 전쟁에서 승산이 없음을 내부적으로 명확히 인지했음에도 대외적으로는 전쟁의 정당성과 낙관론을 유포하며 국민을 기만해 온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안보‘와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청년의 목숨과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이 걸린 전쟁의 진짜 이면을 철저히 통제해 왔음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즉각 행정명령을 발동해 타임스가 더 이상 후속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가압류 조치를 내린다. 국가 최고 권력이 법을 무기로 압박을 가한 것이다. 이때 바통을 이어받은 곳은 바로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였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회사는 곧 주식 상장을 앞두고 있었고, 보도를 강행할 경우 정부와의 소송으로 이어져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은 기꺼이 보도의 승인을 내린다. 회사의 생존과 권력의 압박 사이에서, 오직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영화 <더 포스트(2017>는 이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의 선택의 순간에 집중한다. 이미 한 언론이 정부의 압박으로 보도를 중단한 상황에서,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의 개인적 관계까지 얽혀 있던 그녀가, 사교계의 명사라는 가면을 벗고 국가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길 결심하며 보도 승인을 내리는 장면은 이 작품의 정점이다. 또한 정부의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명판결문도 압권이다. "언론은 통치자가 아닌 국민을 섬겨야 한다." 그렇게 워싱턴 포스트와 타임스는 6대 3의 판결로 최종 승리한다.


진실은 누구의 것인가. 기득권이 내세우는 ‘국익’이나 ‘진영의 논리’라는 대의가 의심과 검증을 밀어내고 사실의 소유권마저 독점하려 들 때, 언론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묵직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언론이 섬겨야 할 유일한 주인은 오직 ‘국민’과 ‘사실’ 뿐임을 워싱턴 포스트의 사례를 통해 깨닫는다.
<성역 없는 추적과 검증의 무게>
: 워터게이트 사건 추적 보도,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더 포스트>의 승리로부터 불과 1년 뒤인 1972년, 워싱턴 포스트는 또 한 번 역사의 변곡점에 선다.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위치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괴한들이 침입했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대부분의 언론은 이를 단순 절도 사건으로 가볍게 다루고 만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 소속의 두 기자인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이 사건에서 납득되지 않는 의문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끈질긴 취재 끝에, 칩입자들의 배후에 백악관과 닉슨 대통령 재선 위원회의 조직적인 불법 도청 및 은폐 공작이 있음을 밝혀낸다.

권력의 심장부를 겨냥한 취재는 결코 쉽지 않았다. 백악관은 보도 내용을 전면 부인했고, 정부 기관은 노골적인 압박을 가해왔다. 그러나 두 기자는 추측으로 빈틈을 메우지 않았다. 대신 미궁에 빠질 때마다 내부 제보자가 남긴 메모에 적힌 글을 되뇌었다. "돈을 쫓아가라." 둘은 그 원칙을 철저히 따랐다. 사람의 말들보다는 자금의 흐름을, 의혹보다는 증거를 뒤쫓았다. 수많은 계좌와 수표를 추적하고, 수백 명의 관계자를 직접 만나 교차 검증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사임으로 이어진 ‘워터게이트 사건’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낸다.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은 이 실화를 건조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카메라가 비추는 건 화려한 특종 발표의 순간이 아니라, 그 특종이 완성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이다. 수백 통의 전화를 걸고, 수없이 거절당하고, 취재 수첩을 빼곡히 채워나가는 고단한 노동. 이 모든 건 오직 단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수행된다. "아직 팩트가 부족해." 편집장 벤 브레들리(제이슨 로바즈)의 이 한 마디는 오늘날의 미디어가 마음속에 새겨야 할 말이기도 하다. 아무리 상대가 거대한 권력이라 해도, 아무리 심증이 확신으로 기울더라도, 완벽히 검증되지 않은 의혹은 자칫 ‘우리 편의 무기’만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냉철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결국 언론을 언론답게 만드는 건 ‘팩트’ 그 자체다. 사실보다 앞선 확신, 검증보다 앞선 속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덧씌운 상상과 음모는 저널리즘이 아닌 오만일 뿐이다. 명확하지 않은 보도가 불러올 파장을 외면한 채, 그저 특정 세력의 구미에 맞는 자극적 가십만을 복제해 낸다면, 언론에 대한 신뢰는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중에도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단 하나의 사실은 언론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우리와 가장 닮은 얼굴이다. 자극을 원하면 자극만 남을 것이고, 확신을 원하면 확신만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팩트를 원하면 팩트만이 남을 것이기도 하다. 결국 좋은 언론은 좋은 국민 위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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