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는 것이 나를 정의할 수 있을까, 젠더리스 패션

젠더리스

젠더리스 패션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Gucci MX, Telfar, 프라다, 로에베를 비롯한 해외 브랜드들은 오래전부터 성별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드는 실루엣과 스타일링을 제안해왔다. 런웨이 위에서 젠더리스는 하나의 선언처럼 등장했다. 남성 모델이 스커트를 입고, 여성 모델이 오버사이즈 테일러드 재킷을 입는 장면은 이제 패션계에서 그리 충격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하지만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런웨이에서의 흐름이, 실제 거리와 온라인 쇼핑몰, 우리의 옷장 안에서는 얼마나 자연스럽게 작동하고 있을까. 젠더리스 패션은 정말 일상이 되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특별한 스타일’로만 소비되고 있을까.


<유니섹스와젠더리스는다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개념의 오차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유니섹스(Unisex)’와 ‘젠더리스(Genderless)’를 혼용하지만, 두 단어는 완전히 다르다.

유니섹스는 일종의 ‘평균화’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의도적으로 소거해 누구나 입을 수 있도록 합의한 옷이다. 반면 젠더리스는 성별의 특징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성별에 귀속되었던 아이템의 한계를 깨부수는 일이다. 남성이 레이스를 두르고 여성이 단단한 테일러드 수트를 치장하는 것. 이는 단순히 이성의 옷장에 손을 뻗는 유희가 아니다. 옷에 박제되어 있던 성별이라는 라벨을 과감히 뜯어내는 해방에 가깝다.


<거리의현주소 — 런웨이보다느린속도>



지금, 거리에서 젠더리스는 어디까지 왔을까. 흐름으로 보면 변화는 분명하다. 남성 패션에서는 레이스, 플로럴 패턴, 트위드 재킷처럼 오랫동안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되었던 소재와 아이템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성 네일은 이제 검은색 단색을 넘어 화려한 컬러와 큐빅 파츠까지 확장됐다. 그 중심에는 지드래곤이 있다. 비비드한 컬러부터 화려한 파츠까지, 과감한 네일 아트로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회적 구조는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국내 브랜드 중 앤더슨벨이나 우영미처럼 젠더리스 컬렉션을 영민하게 만들어내는 곳이 존재하지만, 정작 이를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과 편집숍은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카테고리에 갇혀 있다. 브랜드는 성별을 지웠지만, 유통 구조가 다시 성별의 꼬리표를 붙이는 셈이다. 대중이 일상적으로 젠더리스를 접하기엔 여전히 진입장벽이 존재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SNS 속젠더리스와오프라인의시선 >



SNS에서 젠더리스 스타일은 이미 꽤 익숙한 이미지가 되었다. 남성이 스커트를 입거나, 여성이 오버사이즈 수트를 입는 사진은 많은 사람들에게 “멋있다”는 반응을 얻는다. 하지만 그 반응이 곧 현실의 자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Prada 26 spring menswear / ⓒYoutube

온라인에서는 새롭고 감각적인 스타일로 소비되던 옷이, 오프라인에서는 여전히 시선을 받는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옷을 통해 드러나는 성별의 이탈이 아직 완전히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스타일을 멋지다고 느끼면서도, 막상 자신이 입는 것은 망설이게 되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은 젠더리스 패션이 앞으로 넘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지점이다. 패션은 언제나 시각적인 해방을 먼저 보여주지만, 그 해방이 우리의 몸에 체화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런웨이의 한 장면이 일상복이 되기 위해서는 옷 자체의 변화만큼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채도가 낮아질 필요가 있다.


<결국젠더리스는 '무성(無性)'이아니라 '다양한성질'이다>



젠더리스라는 말은 종종 성별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지루한 무채색'으로 오해받곤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젠더리스 패션은 성별을 없애자는 과격한 선언이라기보다, 옷이 가진 매력이 고작 성별 하나로만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는 유연한 제안에 가깝다. 어떤 옷은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강인할 수 있고, 지극히 장식적이면서도 실용적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입는 옷은 늘 우리를 설명해왔다. 직업, 취향, 계절, 기분, 나이, 때로는 계급까지. 그중 성별은 오랫동안 옷을 분류하는 가장 강력한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제 옷은 우리에게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옷이 남성복인가 여성복인가’ 가 아니라, ‘이 옷을 입은 내가 어떤 태도로 존재하고 싶은가’ 를.

젠더리스 패션이 일상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는 평준화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더 세분화되어 다르게 입을 수 있게 된다는 해방을 의미한다. 성별이 아니라 실루엣으로, 규칙이 아니라 감각으로,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로 옷을 선택하는 일.

결국 젠더리스 패션의 핵심은 옷의 형태가 아닌 '선택의 자유'에 있다. 런웨이에서 시작된 선언은 이제 거리와 쇼핑몰, SNS와 개인의 옷장 안에서 제각기의 언어로 번역되는 중이다. 그리고 그 번역이 완전히 일상적인 언어가 되어 더 이상 '젠더리스'라는 특별한 이름조차 필요 없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이 패션이 우리 곁에 온전히 도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ditor / 김다솜(@kimmdd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