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 뮤직의 프로젝트 《사랑의 단상》이 남긴 기록

잘지내자, 우리

“당신의 이야기가, 우리의 음악이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차마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 문장 하나쯤을 품고 살아간다. 손에 쥐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어 밤마다 혼자 만지작거리는 문장들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린 그 문장들을 더 꽁꽁 숨기고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2000년대 초중반엔 조금 달랐다. 서로의 아픔 혹은 기쁨을 나누는게 조금 더 익숙했달까.

파스텔 뮤직의 《사랑의 단상》 프로젝트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한국 인디 음악 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독보적인 컨셉 컴필레이션 앨범 시리즈이자 옴니버스 문화 프로젝트이다.

단순히 소속 뮤지션들의 신곡을 모아 발매하던 기존 컴필레이션 앨범의 틀을 완전히 깨고, '대중의 사연 + 문학적 모티브 + 인디 음악'을 결합해 팬과 아티스트가 함께 음반을 만들어내는 정서적 연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대중음악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누군가의 기억이 우리의 노래가 되기까지>

이 프로젝트 이름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의 동명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 따왔다. 이 책은 사랑에 빠진 인간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사적인 감정 조각들을 정밀하게 채집한 문학적 고전이다. 사랑을 하나의 완성된 서사나 이성적인 체계로 바라보지 않고, '기다림', '질투', '부재', '눈물' 등 사랑의 순간순간 마주하는 80여 개의 짧은 단상(파편)으로 나누어 파헤친다. 거창한 연애사 대신 열병을 앓는 이가 혼자 쓸쓸히 읊조리는 언어들을 당당히 철학의 무대 위로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주체는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이다. 사랑이 지닌 이기심과 외로움, 끊임없는 오해와 열망의 본질을 담담하면서도 아련하게 풀어낸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 결국 우리 모두가 겪은 사랑의 문장과 닿아 있음을 증명하며, 출간 이후 수많은 시인과 아티스트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샘이 되는 작품이다.

책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의 담론은 오늘날 극도의 고독 속에 있다"고 말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 혹은 이별의 열병을 앓을 때 우리가 느끼는 지독한 고독과 고통은 사실 타인에게 완전하게 전달되기 어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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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 뮤직의 《사랑의 단상》은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단순히 인디 뮤지션들이 모여 신곡을 모아둔 컴필레이션 앨범이 아닌,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고백을 모아, 그것이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감정'임을 음악이라는 언어로 나누는 형태였다. 리스너에게 지독했던 사랑을 하나의 예술이자 아름다웠던 기록으로 전하며 일종의 ‘위로’를 전하고, 뮤지션에게는 타인의 진솔한 삶에서 나오는 "가장 생생하고 깊은 창작의 기반"을 전하는 건강한 교류의 장이였던 것. 이는 한국 인디 음악 역사상 팬과 아티스트가 가장 깊은 감정을 공유하고 연대한 독보적인 프로젝트로 남아있다.


<여러분의 사랑의 단상들을 들려주세요>

《사랑의 단상》이 완성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긴 감성적 여정에 가까웠다. 앨범 기획 단계에서 하나의 커다란 감정적 테마를 정하고 온·오프라인을 통해 대중의 사연을 모았고, 수집된 사연들은 참여 뮤지션들에게 전달되었다. 뮤지션들은 사연을 읽고 자신의 경험과 대입하며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서 멜로디를 뽑아내고 가사를 붙여나갔다. 당시 인디신에서 큰 영향력을 뽐내던 파스텔 뮤직의 아티스트 짙은, 에피톤 프로젝트, 스트레이, 센티멘탈 시너리 등의 참여로 <사랑의 단상 Chapter.5>의 사연 응모에선 약 1255통의 사연이 접수되었고 그 중 11개의 이야기가 선정되었다.

또 이렇게 모인 사연들은 단순히 가사와 멜로디의 영감으로만 소비되지 않았다. 사연자가 보낸 글의 일부, 혹은 원문 에세이가 수록곡 가사와 함께 아름다운 타이포그래피와 사진으로 재해석되었고, 오프라인 전시와 서적 등으로 구성되어 단순히 듣는 경험이 아닌 보고 느끼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커져갔다.

그래서 그런지 <사랑의 단상>이 보여준 진정성은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음악이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몇 초 만에 소비되고 넘어가는 시대에 <사랑의 단상>은 청자들을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창작의 주체'로 끌어들였고, 보편적인 대중의 슬픔을 가장 정성스러운 형태의 예술로 바꿔냈다. 묵묵히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스탠드 불빛 아래서 밤새 적어 내려갔을 나만의 고백들이 모여 완성된 이 컴필레이션 시리즈는, 그렇기에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지나온 수많은 이들에게 단순한 음악 그 이상의 의미로 남았다.


<사랑의 단상 Chapter.5 - ‘잘 지내자 우리’>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공이자, 프로젝트를 알린 노래는 단연 <사랑의 단상 Chapter.5>에 수록된 ‘짙은’의 <잘 지내자, 우리>일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을 조은영씨의 사연으로부터 시작된 이 노래는 큰 공감을 사며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플레이리스트에 자리잡고있다. 한 인터뷰를 통해 짙은은 “조은영님의 사연을 거의 그대로 가사에 녹였다”고 밝혔다.

* 실제 사연을 보면 정말 사연이 그대로 가사가 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조은영님의 사연]

마음을 다 보여줬던 너와는 다르게 지난 사랑에 겁을 잔뜩 먹은 나는 뒷걸음질만 쳤었지. 너는 다가오려 했지만 분명 언젠가 떠나갈 것이라 생각해 도망치기만 했다.

같이 구름 걸터앉은 나무 바라보며 잔디밭에 누워 한쪽귀로만 듣던 달콤한 노래들이 쓰디쓴 아픔이 되어 돌아올 것만 같았다. 매일 전해져 오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너의 다정함과 자상함이 곧 냉정함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까짓 두려움, 내가 바보 같았지 하며 솔직해질 자신 있으니돌아오기만 하면 좋겠다 생각한다. 그러기엔 너는 너무 멀리 가버렸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있다.

분명 언젠가 다시 스칠 날 있겠지만 모른 척 지나가겠지. 그때 최선을 다한 너는 받아들이겠지만 서툴렀던 나는 아직도 기적을 꿈꾼다. 눈 마주치며 그땐 미안했다고 용서해달라고 이야기 하는 날을

그때까지 잘 지내자 우리.

안녕.



조은영씨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뭐가 그렇게 미안할까. 아직도 다시 스치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 담담하면서도 솔직한 이 고백은 이상하다. 분명 조은영씨의 이야기이지만 나의 이야기이기도, 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구구절절하게 그 순간을 설명하는 글이 아닌 담담하게 또 꾹꾹 눌러담은 이 ‘모호함’이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싶다. 아직 이 노래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꼭 들어보길 바란다. 이 이야기를 알고들으면 또 다른 나만의 이야기가 겹쳐보일지 모르니까.

짙은 Zitten - 잘 지내자 우리 [KBS제주]2021 힐링콘서트 당신의 안녕 / ⓒYoutube

《사랑의 단상》 컴필레이션 앨범은 대중음악이 거창한 서사와 극적인 사건이 없이도 얼마나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이다. 공모를 통해 수천 건씩 접수되었던 사연들은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영화 속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 속 아주 짧은 순간, 찰나의 스침, 차마 전하지 못한 말 한마디 같은 '찰나의 파편'들이 모여들었다. 그리 대단한 서사의 이야기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기억들이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당시 앨범에 참여한 파스텔 뮤직의 아티스트들의 해석과 음악적 역량 역시 이 프로젝트의 큰 성공을 이끈 중요한 요인이다. 타인의 이 작고 유약한 기억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않고 더 깊은 사랑의 서사를 상상하며 첼로와 피아노, 묵직한 건반의 선율 위에 올려놓았다. 누군가의 외로운 중얼거림이 섬세한 편곡과 절제된 음색을 만나 노래로 완성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고독한 개인이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위로였다.

[Trailer] 사랑의 단상 Chapter 5. The Letter From Nowhere / ⓒYoutube

결국 이 앨범 시리즈가 남긴 가장 큰 미덕은 공감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미덕은 지금 우리의 사회가 채우지 못하는 가장 큰 공백이 아닐까 싶다. 내가 아닌 누군가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그 공감.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음악이라는 매개가 단순히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주고받는 유기적 가치를 지녔음을 상기시킨다. 질 높은 텍스트와 정갈한 사운드가 빚어낸 이 아름다운 연대는 한국 인디 음악사에서 리스너와 뮤지션이 함께 써 내려갔던 가장 다정한 대화일 것이다.





Editor / 김수용(@_fulkim)